황골 엿

by 혜복

가위를 잡을 일 있을 때 나도 모르게 서너 번 빈 손놀림을 할 때가 있다. 급변하는 세월에 편승하느라 잊은 줄 알았는데 귀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경쾌한 쇳소리 몇 번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에 쫑긋하던 그 시절, 째깍째깍 소리가 일으키는 파장은 동네 골목을 흔들어 놓고도 모자라 무구한 어린 마음을 짓궂도록 자극했다. 엿은 대표적 길거리 간식이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직업을 바꾼 옆집 아저씨도 해 지면 리어카를 끌고는 귀가했는데 엿판 위에는 다음 날 팔아야 할 각종 엿이 가지런히 실려 있었다.

시장 골목 몇 집에서도 조청이나 물엿을 통에 담아 팔거나 각종 엿을 진열해 놓곤 손님을 기다렸다. 윤기가 반질반질한 갈색의 엿은 콩가루 단장을 하고 있거나 고소한 깨와 땅콩을 보석처럼 품고는 지나는 이들에게 단침을 선사하곤 했다. 접시만 한 것, 쟁반만 한 그것들을 어쩌다 사더라도 먹기 위해선 깨뜨려야 했는데 그 행위는 매번 신중함을 요구하곤 했다. 입안에서 살살 녹이다 보면 어느새 침과 함께 삼켜지던 추억의 간식이다. 지날 때마다 눈이 가던 ○○ 엿 공장은 그 글씨체만 봐도 정감이 가지 않았던가. 가위 소리가 단박에 추억을 환기시키지만 그 사이 많이도 변했다. 엿 공장 있던 장소는 콘크리트 숲이 되었고 요즘 아이들은 굳이 엿이 아니더라도 호시탐탐 달달한 것들에게 공격당하는 처지다. 뿐인가. ‘엿 같은 세상’ ‘엿장수 마음대로’ ‘엿 먹어라’처럼 종종 비하의 말로 쓰이니 이래저래 억울한 고유명사다.


원주 치악산 자락 어느 한적한 외곽에 황골이란 마을이 있다. 먹을 게 마땅치 않았던 시절 그나마 흔한 옥수수를 주원료로 엿을 고느라 가마를 걸었다. 마른 옥수수를 맷돌에 타개 불린 후 다시 갈아 엿죽을 쑨다. 엿기름을 넣고 솥에서 삭히면 단맛이 우러난다. 한없이 겸손한 마음으로 불을 지켜야 한다. 오랜 시간 끓이다 맑은 물이 고이면 자루에 넣어 주물러 짠 다음 솥에 다시 부어 그 엿물을 졸인다. 강원도의 전통 음식, 건강한 향토 음식의 자부심은 쉬이 얻어진 게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때도 명성이 전국적으로 자자했던 원주의 옥수수 엿, 어림잡아 백 년에서 백 사십 년의 역사를 지닌 황골엿을 몇 대째 가업으로 계승해 온 곳이 있으니 그 이어짐이 실로 위대하다. 손쉬운 인스턴트 음식에 길든 요즘, 곡물이 가진 당 성분에 시간과 정성이 보태져 완성된 맛은 표현하기 미안할 정도로 건강한 단맛이다.


어릴 때만 해도 동네에 엿을 고는 집이 더러 있었다. 친구 집에 놀러 가 장판이 거무스레하게 된 이유를 물으니 엿 고느라 불을 땔 때 장판이 눌어붙었다고 했다. 우리 집에는 없는 큰 행사였기에 나도 덩달아 친구네 엿 고는 날이 기다려졌다. 마음씨 좋은 친구가 한 조각 종이에 싸 오기를 바랐지만, 엿이란 게 뚝딱 그렇게 덜어 올 수 있는 성질이 못 된다는 말에 애가 달았다. 엿물을 폭 달여 먼저 조청을 만들고 조청을 졸여 굳혀야만 엿이 된다고 친구는 설명했지만 단맛에 목마른 우린 그 애가 엿 싸 오는 날만 기다렸다.

기회는 바람처럼 예고 없이 찾아왔다. 그 친구의 입에서 희소식이 터져 나왔다. 그날은 부모님 다 어디 가시고 안 계시니 하교 후 자기 집에 가서 놀자고 했다. 엿이 벽장 속에 있는데 꺼내 먹어도 잘 모를 거라는 말에 하교 시간만 기다렸다. 토요일임에도 시곗바늘은 잔뜩 게으름 피우는 느낌이었다. 그 친구는 할머니와 한방을 썼는데 우르르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우리에게 ‘오늘이 반공일인가?’ 하고 물으시곤 마당 설거지를 하셨다. 예나 지금이나 수더분한 그는 벽장 앞으로 바짝 다가선 우리에게 공평하게 엿을 나눠줬다. 붙지 않게 하기 위함인지 흰 가루를 골고루 묻힌 채 벽장 안 광주리 안에서 친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파는 엿과 달리 생각했던 것보다는 덜 딱딱하다고 얘기를 했었던가? 농축된 단맛을 채 표현하기도 전에 우르르 그 방에서, 아니 친구네 집에서 도망쳐야 했다. 호랑이같이 무서운 할머니가 들어오시며 ‘버르장머리 없는 에미나이들’ 하시며 이북 사투리로 어찌나 야단치시는지 줄행랑치는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가슴은 두방망이질에, 책가방 속에선 연신 필통이 덜거덕거렸다. 저만치 할머니 안 보이는 산 밑에 주저앉아서야 입에 문 엿은 고난 후 쟁취한 맛이어선지 꿈에서나 경험할 맛이었다.


혹시라도 친구네가 대대로 엿을 고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힘들고 외로운 노동이라 그 작업은 친구 어머니 대에서 멈췄겠지만 가끔 고향을 생각하면 노기 띤 할머니와 그 친구 얼굴이 겹치곤 한다. 그 어른이 돌아가시고 우리도 나이를 먹고 난 지금은 할머니를 이해하고도 남는다.

단 것 고픈 악동들에겐 그저 주전부리였지만 어른들에겐 엿이 주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세밑에 만든 조청으로 과질을 만들어 조상님 상에 올렸고, 설날엔 복엿을 먹으며 소원을 비는 풍속도 있었다고 한다. 시험의 합격을 기원할 뿐만 아니라 경사스러운 날에 빼놓을 수 없는 게 엿이었으니 혼례 후 폐백상이나 근친 이바지 음식에 담겨 얼마나 귀하게 다뤄졌을지 짐작이 간다. 평소에는 맘 놓고 먹을 수는 없었지만 어엿한 상비약으로 기운이 딸리거나 소화가 안 될 때만큼은 약 삼아 한 숟갈 쭉 빨아 넘기던 조청 단지도 떠오른다.


황골에 밤꽃이 피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밤송이가 맺혔다. 생각해 보니 사라져 버린, 사라져 가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보존과 계승이 녹록치 않음을 알기에 전통은 발명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된다. 오랜 시간 자리를 뜨지 않고 강원의 특색을 살려 삶을 지키고, 맥을 이어 온 황골엿이 있다는 게 새삼 다행스럽다. 천연의 재료가 어울려 시간과 한 마음 되어야만 응축된 달콤함이 완성되듯 사람의 숙성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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