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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윤이 Mar 01. 2024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나는 어른이 된 후 누군가 죽어서 장례식장에 오라고 연락이 오면 가기는 가야 하는데 3일을 고민하다가 그냥 지나간다. 왜냐하면 몸이 소름이 돋으면서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친한 후배의 남편이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왔을 때도 그랬다. 그래서 장례가 끝나고 후배를 만나서 식사를 함께 하고 백일제사 때 쓰라고 못 전한 부의금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 후배가 어린이집을 요즘 어린이집을 그만뒀다고 해서 위로해 주려고 만나서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장례식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었는데도 무엇 때문인지 장례식에 가는 것이 무섭다고 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있었던 거 아니야."

후배에 말애 나는 아니라고 했다.

"생각해 봐 장례식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을 거야."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어린 시절에 본 시체생각이 났다

내 나이 10살쯤 되었을 때였는데 우리들이 뛰어노는 마당은 조금 높은 곳에 있고 마을길 앞에 조금 작은 마당이 있는 친구의 집이 있었다.

 어느 날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보는 하얀 영구차가 들어오더니  서울에 살던 친구 오빠가 죽었다며 시체가 들것에 실려 차에서 내려졌다. 친구의 오빠는 돌쟁이 아들을 둔 26살이라고 했다.

외지에서 죽은 사람은 집안에 들이지 않는다는 옛 풍습에 따라 마당에 놓은 시체는 흰 천으로 덮여있었는데 노란 발과 까만 햇볕에 빛나는 머리카락이 흰 천밖으로 나와있었다. 날씨는 장마 끝이라 땅은 축축하고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은 그 시체의 머리카락을 더욱 빛나게 했다.

죽은 사람을 처음 본 아이들은 우리가 노는 마당 끈에서 쪼그리고 앉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친구의 오빠를 우리 마당에서 보이는 산 100m도 채 안 되는 곳에 산소를 썼다.

산소를 쓰기 위해 주변의 나무를 베고 파헤쳐진 붉은 흙이 보이는 것이 무서워해 가지면 밖으로 나가는 것을 싫어했다. 마을 길에서 집을 들어오는 길목에서도 보이고, 마당에서도 보였다. 나는 여름방학 내내 사랑방에서도 빤히 산소위치가 보여 사랑방에 심부름을 가게 되면  무서웠다. 

그 시절 화장실이 밖에 있었다. 밤에 화장실을 가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머리가 하늘로 솟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나는 그해 여름방학 내내 아팠다. 원인 모를 병에 걸려 부모님들은 많이 걱정을 하셨고, 나 또한 무섭다는 말을 부모님께는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병원에 데리고 가도 병은 나을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그해는 그렇게 무서운 여름을 보냈다.


 우리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죽으면 우리 마을 야산 각자의 산에 묻힌다. 산이 없는 사람은 마을 사람들이 회의를 해서 적당한 곳에 묻어준다. 야산에는 애총(어린아이의 무덤) 많다고 들었다. 그래서 마을 길을 걷다 보면 누군가의 묘가 보인다. 나는 그런 것을 보는 것을 싫어했고, 그 주변을 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남들은 전원생활을 한다고 우리 마을에 땅을 사서 전원주택을 짓고 들어오는데 난 땅이 있어도 지금도 그 마을에 가기 싫어했다. 좋은 아름다운 추억이 더 많은 고향인데 나는 왜 고향으로 가는 것이 싫었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아마도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은 것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린 시절에 감당하기 힘든 충격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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