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험 보러 가던 날
친구들과 남한산성에 갔다.
오랜만에 동문을 걷게 되었다.
중학교 때 수학여행 왔던 기억이 있는 곳이다.
남한 산성은 산세가 깊어서 그런지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동문 쪽은 동쪽이어서 눈이 많이 녹았지만 맞은편 쪽은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옷을 얇게 입고 갔는데 바람이 심하게 부는 것 같아 일기예보를 봤다.
남한산성에 바람이 5m/s이었다.
오랜만에 사진도 찍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서 기분 좋게 집에 돌아왔다.
샤워를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런데 남한산성에서 몸이 추웠는지 피로가 많이 몰려왔다.
다른 날은 머리를 말리고 손질을 하고 자는데 그냥 자고 싶었다.
침대에 누워 기도를 하면서 사르르 잠이 들어가는 순간에 내 머리에 먼 옛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시험을 보러 가던 순간이었다.
우리 집에서 시험을 보러 가기 위해 차를 타는 곳까지의 거리는 5~6km쯤 된다.
산골에서 읍내로 가는 길은 20리였는데 그 길을 중학교까지 다녔다.
양쪽길중에서 한쪽은 밭이 50m쯤 있고 밭 끝이 산이고, 다른 쪽은 논이 50m쯤 있고 개울옆이 산인 길이다.
새벽에 일어났다.
옷을 입고 문을 열고 마루를 내려와 신을 신고 큰오빠가족이 자는 방과 부모님이 계신 방을 쳐다보았는데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마당에서 밖을 보아도 깜깜했다. 대문을 열고 나갔는데 별도 달도 보이지 않고 산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뛰기 시작했다. 육감으로 길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적막하다고 할까?
중3인 여학생에게 그 어둠이 짓누르는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앞도 뒤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길을 얼마나 빨리 뛰었을까?
우리 마을에서 4km쯤 아래에 사는 친구가 차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나와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자려고 누웠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 생각은 내가 공부를 하기 위해 그 어둠 속을 뚫었듯 그 어떤 이유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책상 앞에 앉아 머리를 단장하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좀 전에 쓰려다 그만둔 글을 완성하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왜 그런 생각이 났는지는 여운이 남아있었다.
엄마는 마흔넷에 나를 낳으셨다.
그날 시험을 보고 왔는데 엄마가 내게 말씀하셨다.
"이제는 올케한테 살림을 넘겨줘야 할 것 같아서 모든 것을 넘겨줬다."
그랬더니 올케가
"내 아이들이 네 명이나 되는데 저는 시누공부까지는 못 시켜요."
라고 했다고 하시며,
"시험 보러 가는데 내가 너에게 밥을 해주고, 잘 보고 오라고 하면 고부간에 갈등이 생길 것 같아서 모른 척했다. 너를 공부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못하고 넘겨준 것 같구나. 미안하다!"
나는 6:1로 합격을 했다.
고지서를 가져와 아버지께 드렸다.
아버지는 돈이 없으셔서 친구의 아버지한테 돈을 꾸어 오셨다.
학교에 붙었는데 어떻게 안 보내냐며,
그런데 친구의 고등학교는 농어촌학교여서 등록금이 24,000원이었는데 도시의 사립학교는 76,000원이었다.
아버지께서 학비가 3배가 더 비싸다고 하시며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
오늘 우연히 고등학교 시험을 함께 보러 갔던 친구가 전화를 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시험 보러 가던 생각이 갑자기 나서 친구가 생각났다고 하며 이야기를 해줬는데 그 친구가 "그래서 너 어떻게 학교에 다녔어."
하고 물어봤다.
"작은 오빠가 월남에서 돌아오고 은행에 입사하면서 작은 오빠가 나를 가르치겠다고 했다.
작은 오빠는 결혼을 해서도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등록금을 대 줬어."
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그때의 이야기를 잠시 하고 화재를 돌렸다.
문득 떠오른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어둡고 무서웠던 그 길도 밝고 아름다운 삶으로 열어줬듯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멋진 나의 삶을 보여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