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12월은 여름, 워홀 1일 차

by 영이

2016.12.19.~20.


모든 여정에는 해야 할 일이 뒤따른다.

시드니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 할 일은 세 가지였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것, 입국수속을 하는 것, 마지막으로 화물 편에 부친 짐을 찾는 것. 비행기에서 내리는 것이야 두 다리로 걷기면 충분했고, 입국수속은 손이 모자라긴 했어도 워홀 승인 레터와 여권을 주섬주섬 꺼내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마지막 복병은 내 볶음고추장튜브와 참치캔. 혹여나 호주 음식이 입맛에 안 맞을까 걱정되어 챙긴 비상식품이 걱정거리가 될 줄이야... 대비는 했으나 뒤따르는 걱정 또한 내 몫인 줄은 세상몰랐다. 다행히도 걱정과는 달리 아무도 나를 붙잡는 사람은 없었고 짐 찾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큼지막한 스포츠가방과 묵직한 캐리어는 무사히 찾을 수 있었다.


백팩에 노트북 가방, 축구선수들이 들고 다닐 스포츠가방을 올린 캐리어까지. 해외생활 대비는 확실하겠으나 역시 또한 간과한 점이 있었다. 한국의 12월은 한겨울이었지만, 호주의 12월은 한여름이었다. 안 그래도 평소에 땀을 많이 흘리는 체질인데, 한순간에 바뀐 계절 앞에 온몸은 이미 땀으로 샤워한 채로 이동하게 됐다. 낑낑대며 지하철 계단도 오르고 내리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참치캔이나 먹는 것들은 먹고 나면 짐이 줄어드니까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어디 정착한 것도 아닌 나한테 이렇게나 많은 짐이 필요한가 하고 말이다. 짐 때문인지 아니면 길을 잘못 든 것인지 모르겠으나 분명 센트럴역 바로 옆이라 했는데 숙소까지는 점점 더 멀게만 느껴졌다. 캐리어를 밀고 당기며 확실한 건 어떤 여행이든 짐이 너무 많은 건 분명 스스로에게 짐이 된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됐다. 곧 시계탑이 보이고 조금 더 걷다 보니 숙소에 도착했다. 땀벅벅이인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보는 카운터 직원과 조우한 후 방을 안내받았다. 4인실에는 이미 두 명의 청년과 나이가 지긋하신 백인 어르신까지 세 명이 보였다. 방을 구경할 새도 없이 지퍼 고리에 자물쇠로 잠근채 밖으로 나섰다.



정신없이 밖으로 나선 이유는 영준이를 만나기 위해서다. 서울에서 영어학원 다닐 때 알게 된 동생인데, 이 친구는 이미 시드니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호주 도착하면 보기로 한 것이다. 존재만으로 힘이 된다는 게 이런 걸까? 이 나라에서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던 나인데, 한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안도의 기분이 들었다. 이런 거 보면 정말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볼까 하다가 시드니 하면 역시나 오페라 하우스가 떠올라서 얘기했더니 'Circular Quay'*에서 내려서 보기로 했다.

오페라 하우스 근처에서 영준이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 달라는 그 말이 참 고마웠다.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은 고민 없이 바로 스테이크로 정했다. 앞으로 일하면서 아낄 궁상을 떠올리니 미리 먹어두는 게 이득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관광객이면 보지도 않았을 텐데, 워홀러로 시작한 여정이다 보니 서빙하는 점원도 음료를 만드는 점원에게도 눈이 갔다. 종종 동양인이 보이니 약간 선망의 대상처럼 초롱초롱 바라보게 되기도 했다. 다시 숙소를 향하며 주위를 둘러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난 이런 곳에서 일할 수 있을까? 에이.. 영어 잘해야겠지?'


*2016년 당시, 호주에서 Train노선은 'Trip View'라는 앱을 썼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바뀌었을 수도-!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며 내 영어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게 실전인 외국에 나와보니 며칠은커녕 하루만 있어도 내 영어실력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영어학원도 이삼 년 다니고 공부하며 나름 실력도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내가 제대로 한 게 맞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도 좀 더 실전처럼 연습할 수도 있었는데 왜 그렇지 못했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는 영어를 쓰는 것보다 재밌는 영어공부에 빠져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유하자면 마치 고기를 잡겠다며 투망을 던지는데, 정작 투망의 그물망도 큼지막 큼지막하고, 심지어 고기를 잡는 것보다 투망을 던지는 것에 재미를 느낀 나라고나 할까..? 그걸로도 고기는 잡히겠지만, 던지는 족족 물고기가 딸려 올라오는 건 아닐 테니 그 상황이 딱 내 상황 같았다. 완벽한 준비란 건 없겠지만 외국에 나가고 게다가 일하며 돈까지 벌 생각을 했으면서도 너무나 허술했던 내 모습이 조금 부끄러웠다.

모든 행동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준비를 제대로 못한 것도 나고, 그 뒷을 책임질 사람도 나다. 호기롭게 쓰고 있지만 사실 그때는 정 안되면 일주일 관광하다가 귀국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혼자다. 타국에 오니 더 실감이 났다. 서울에서 자취할 때도 혼자였지만 그때의 느낌과는 또 달랐다. 그때는 평소의 외로움 농도가 조금 더 짙어진 정도였다면, 호주에서의 느낌은 마치 이 넓은 세상에서 내가 티끌이 된 느낌이 들었다. 당장 생명의 위협이나 안위를 걱정하게 되는 그런 것. 특히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겨도 바로 누군가가 나를 챙겨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큰 두려움으로 급습했다.


숙소에 돌아와서 짐을 풀렸는데 가장 지퍼에 걸어둔 자물쇠가 키를 꽂아도 열리지 않았다. 참 하루 안에 별의별 일이 있구나 싶었다. 카운터에 사람을 불러서 상황을 보여주고 톱을 빌려서 끊었다. 캐리어는 비번으로 잠그는데 앞으로 스포츠가방의 짐은 어떡하나 싶었다. 게다가 아까 낮에 체크인할 때 마주쳤고 이 상황을 모두 보고 있던 백발의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나니 내 몸의 안위보다 내 짐의 안위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 어르신은 나머지 룸메이트인 둘에 대해 살짝 귀띔을 해주셨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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