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숫자 한 자리만 바뀐 것뿐인데, 온 세상이 바뀔 것만 같았다. 모든 게 부족해보였고, 이미 늦은 듯한 느낌에 조급함과 부담감이 앞섰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도 무언가 시작하기에 전혀 늦지 않았는데 하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지금도 늦지 않았단 건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그때의 '남들보다 뒤처졌구나'라는 생각에 모든 게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더니 남은 가지 수는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러니 호들갑을 떨 수밖에.
전문대를 나오며 딴 면허증 덕분에 취업은 무리가 없었다. 게다가 병원에서 일을 하며 생에 없을 '선생님' 소리를 들었으니, 농사만 짓던 부모님은 더울 때 시원하고 추울 때 따뜻한 그 직장을 두고 왜 그렇게 방황이냐며 매번 잔소리를 늘여놓으셨다.
한 직장에 진득이 붙어있지 못했다. 그러다가 소개받은 영어학원을 다니는 게 너무너무 재밌었다. 하루종일 환자에게 시달리다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영어 스피치 공부를 한다는 게 신기하고 즐거웠다. 의정부에서 일을 했는데, 이대까지 왕복 세 시간은 족히 걸렸지만 피곤하지 않았다. 이게 즐거움인가 싶었다. 학원에서는 '절거움'이라고 표현했다. 영어강사 서바이벌에서 우승한 선생님이자 대표님, 그 밑에 수강생부터 강사가 된 선생님들까지, 일상의 무료함이 즐거움으로 바뀌는 순간,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일을 하며, 일을 하지 않으며 이삼 년을 수강하며 그 꿈을 키웠지만 그에 비해 노력의 총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영어 선생님을 꿈꿨다지만, 전공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특출 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영어 스피치를 공부하며 문법적 영어지식뿐만 아니라 핵심 가치나 스피치 스킬 같은 것은 흉내 내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역시나 큰 오산이었다. 핵심 가치를 정의해 내는 것, 그 안에 스며든 기법을 찾는 건 수강생일 때와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 준비할 때와는 천지차이였다. 벽을 느꼈고, 그럼에도 꿈은 깨지 못하고, 눈 감은 채로 강사가 되고 싶다며 주변에 말을 하고 다녔다.
계속되는 관심과 구애에 멘토이기도 한 대표님께서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셨다. 이 일을 처음 시작하면 무소득의 기간이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건 얼마나 걸릴지 장담할 수 없다고. 최근에 수업을 열고 있는 그 선생님도 그 기간을 지나왔다고, 그럴 수 있겠냐고 물으셨다.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알 수 없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그건 기회였다. 하지만 나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고 도망쳤다. 학원 생활에 집중해 보겠다며 직장까지 그만두고 다니던 터라, 월세 내는 것도 빠듯한 내게 수입이 없다는 건 동아줄이 사라지고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모습만 떠올랐다. 얼어붙은 표정으로 고스란히 내 마음은 드러났다. 나는 더 이상 서울생활을 이어갈 이유를 찾지 못했다. 월세도, 잠시 감시 바랐던 꿈도 잃어버린 그 순간, 나는 여기도 저기도 끼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왔다.
도망, 안식을 가장한 확실한 도망이었다. 금의환향을 꿈꿨지만 이룬 건 하나도 없었다. 누군가를 탓하고 싶었지만 그 누구도 탓할 수 없었다. 오롯이 나만의 문제, 나만의 결정, 책임. 하지만 못된 마음은 항상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 했다. 그럼에도 돌고 돌아 향한 화살표는 항상 나를 가리켰다.
영어 강사의 꿈은 잠시(?) 접었지만, 그동안 영어학원을 다녔던 시간이 아까웠다. 그래도 이삼 년을 다녔는데, 이걸로 뭐라도 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원에서도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로써 글쓰기' 같은 것을 했는데, 생산자로써 영어를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 스피킹, 스피치를 주로 했던 곳이라 실전에도 먹힐 거라는 생각은 했다. 분명 왕초보는 벗어난 것 같은데... 그렇다고 길 가다가 만난 외국인에게 척척 프리토킹을 할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 의심이 들었다.
'나는 잘할 수 있을까?'
방법이 없었다. 아니, 남은 가짓수 중에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워홀, 워홀을 가보자. 영국은 보증금이 비싸고, 캐나다는 신청에서 떨어졌다. 남은 건 호주뿐. 통장잔고를 봤더니 비행기 티켓 값은 되는데 초기 정착비가 아슬아슬했다. 돈이 필요했다. 지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배운 영어로 어떻게든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서른을 앞두고 나는 워홀을 결심, 아니, 그 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 경험이 내 인생에 자양분이 되었는지, 앞으로 될 수 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여전히 지갑은 비었고, 영어도 유창하지 않다. 다만, 그때의 그 불안과 위기가 꼭 그것만을 남기지는 않았다는 점. 미칠 듯이 힘들고 불안했던 그 순간이 곧 변화의 시작이었다는 건 분명하다.
고민은 스스로 변화의 요구며, 불균형은 곧 균형을 부른다. 예쁘고 멋진 수만 남아있는 게 아니더라도 결국 움직이면 무언가 된다. 두려움을 그대로 두려하면 잠식당하고 만다. 두려하지 말고 눈 앞에 두고서 두 눈 질끈 감고 한발짝만 내딛어보자. 형편없이 보였던 그 수도 새삼 다르게 보일지도 모르니까. 서른, 그렇게 워홀을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