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20.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나온 지 두 달이 지났다. 하지만 난 아직 한국, 어느 도시로 갈지도 못 정했으니 항공권 구매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럼에도 12월 말로 항공권을 조회해 본 이유는 기왕이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가보자는 마음이 컸고, 욕심은 또 얼마나 큰지…, 아직 호주도 안 갔으면서 끝나고 나서 영국 워홀까지 염두에 둔 계획이었다. 도시는 몰라도 이곳저곳 항공권을 조회해 보는데, 요상하게 조회할수록 매번 오르는 느낌이 드는 신기한 연말 항공권이었다.
평소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 '고민남', 이번에도 얼마나 더 시간을 끌 건지 모르겠지만, 선택의 기로에 서면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 고민이 된다. 둘 중 하나가 원 없이 좋으면 모르겠지만, 뭔가 하나가 마음에 들면, 꼭 하나는 아쉽다. 바쁜 도시는 일자리는 많아 보이는데 생활비가 비싸고, 도회지로 가자니 생활비는 싼데 고향에서도 지긋지긋한 농사일을 타지까지 가서 하고 싶지 않단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 욕심, 신중함, 두려움, 그 어느 것으로 포장해도 곧잘 그럴싸하게 보일 정도로 세 가지 다 뒤섞여 있었다.
고르고 있다지만 내 마음만 신경 쓸 수는 없었다. 어딜 가나 중요한 건 영어로 살아남을 수 있냐는 생존 문제. 막상 그 문제를 떠 올리고 나면 '차라리 몸으로 때워야 할 것 같은데...' 하고서 어디든 일만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뒤따랐다. 그나저나 이렇게 고민만 하다가는 정말 올해는커녕, 내년도 힘들겠단 생각이 들었다. 호주, 가긴 갈 수 있을까?
영어학원에서 알게 된 선화에게서 책을 추천받았다. 장강명 작가의 <한국이 싫어서>. 워홀을 생각 중이라는 내 이야기를 기억해 주고 호주와 관련된 책이라며 알려줬다. 바로 찾아서 읽어봤다.
'내가 여기서는 못 살겠다고 생각하는 건……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중략) 아프리카 초원 다큐멘터리에 만날 나와서 사자한테 잡아 먹히는 동물 있잖아, 톰슨가젤. 걔네들 보면 사자가 올 때 꼭 이상한 데서 뛰다가 잡히는 애 하나씩 있다? 내가 걔 같아. 남들 하는 대로 하지 않고 여기는 그늘이 졌네, 저기는 풀이 질기네 어쩌네 하면서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있다가 표적이 되는 거지.
하지만 내가 그런 가젤이라고 해서 사자가 오는데 가만히 서 있을 순 없잖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은 쳐 봐야지.'
_ *출처: <한국이 싫어서>, 장강명 장편소설
책을 펼치자마자 읽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장이 되었다.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라는 문구가 가슴에 콕 박혔다. 남까지 갈 것도 없이, 스스로만 보아도 성에 차지 않았으니, 책 속 저 문구는 그냥 나를 설명해 주는 느낌이 들었다.
나름 나도 한국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기에 한국을 떠나며 호주를 시작하는 주인공 계나의 모습에 푹 빠졌다. 물론 소설 속 계나도 나도 한국이 싫어서 떠나는 건 같았지만, 상황은 영 달랐다. 회계사를 따려고 호주에서 석사를 준비한다는 계나와 가서 일이나 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내 모습은 같을 수 없었다. 다 읽고 나니 소설의 내용이 결코 소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있을 법한 누군가의 이야기로 정해진 순간, 나는 소설처럼 될 수 없으니 우선 할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 돈, 체력. 필요한 건 대충 정해져 있었다. 정해져 있는 건 분명한데, 뭔가 빠뜨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목표, 목표가 없었다. 뭘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어렴풋이 '워홀을 가보고 싶다' '영어를 써서 돈을 벌고 싶다' 정도만 생각했지 눈에 보이는 손에 잡히는 무언가는 없었다. 어느 도시에 어느 잡이 있는지, 수익은 어디가 괜찮은지, 워홀과 관련된 책과 블로그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똑같이 흉내 낼 순 없어 보였다. 쟤는 젊어 보였고, 영어도 곧잘 해 보이는데, 나는 할 수 있을까? 호주, 갈 수 있을까? 여전히 마음속 저울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