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01.
맨 처음 목표는 올해 안에 출국이었다. 그런데 막상 고향집에서 지내다 보니 너무 편했다. 서울이 시베리아보다 추울 거란 생각이 든 자취방에 있다가, 반팔로 지내고도 겨울인지 알 길 없던 고향집에서의 생활은 너무 달콤했다. 다만 워홀에 대한 생각은 '어차피 가긴 갈 텐데…, 새해 지나고 갈까? 아니, 설날 지나고 갈까?' 하고서 하루하루 미뤄지기만 했다.
그렇게 또 하루를 보내는데, 오랜만에 민호선생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민호선생님은 2년간 수강했던 영어학원의 대표님이자 강연 스피치 코치를 맡고 계신데, 선생님 또한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오신 경험이 있었다. 경상도 남자 특유의 스타일로 간단한 안부 톡이 왔다.
'안동?
/ 언제 가노?
/ 왜케 밀려?'
이 세 개의 톡에 나는 또 주저리주저리 당장 안 갈 이유와 신세한탄을 적어 보냈다. 선생님은 사진 하나를 보내셨다.
'재산을 잃은 사람은 많이 잃은 것이고, 친구를 잃은 사람은 더 많이 잃은 것이며, 용기를 잃은 사람은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다.'
_ <돈키호테를 읽는 명언의 향연>
톡을 확인하고 나서 한동안 멍해졌다. 분명 집에서 버스 타러 나서는 길이었는데, 집 앞을 나선 지 열 보 걸음에서 멈춰 서서 문구를 읽고 또다시 읽었다. 버스는 놓쳤다. 그리고 톡이 하나 더 왔다.
'병신년은 외국에서 마무으리, 티켓팅은 너와 나의 의리'
생각해 보면 자신이 없었다. 나이도 그렇고, 언어도 그렇고, 다른 무엇보다 이렇게 물러터진 멘털로는 어딜 가도 잘 안될 것 같았다. 첫 직장 이후, 총 3번의 퇴사, 그 뒤로는 약 1년간 알바생활. 내 전공 분야에서 도태된 느낌이 들고 나서 전전긍긍하던 내 모습까지. '이 일을 계속해서 할 수 있을까?' 같은 고민은 항상 들었지만, 막상 다른 일을 도전할 용기도 재능도 없다는 생각에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보다는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먼저 들었다. 전혀 다른 생활인 워홀을 준비하면서도 여태까지의 내 모습이 발목을 잡고 있을 줄이야. 당장 변화까지는 몰라도 붙잡고 있는 무언가는 끊어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_
티켓팅을 마쳤다. 질러버렸다. 출국일은 12월 19일(2016), 목적지는 시드니로 정했다. 티켓팅을 하고 나니 진짜 외국을 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비자를 신청하던 때가 떠올랐다. 본격적으로 비자를 알아본 게 9월 말쯤이었나? 계약이 끝나가는 서울 자취방 이삿짐을 싸며 부랴부랴 비자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몸무게야 원래 비만이겠거니 했는데 갑작스러운 복병을 만났다. 바로 혈압, 140/100에 육박한 혈압 때문에 혹여나 호주 이민성에서 비자승인을 거부될까 걱정이 됐다. 일을 하는 비자인데, 혈압 높은 사람은 거부하지 않을까 같은 걱정이 들었으니 말이다. 생각지도 못한 일은 항상 생긴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대응할 수 없다. 그다음 수는 꼭 한 수를 둔 다음에 둘 수 있다.
시작이 반, 아니 티켓팅이 반이었다.
티켓팅을 하고 나니 남은 하루하루가 째깍째깍 초단위로 사라지는 게 눈으로 보였다. 첫 숙소도, 캐리어도 없고, 환전 또한 한 게 없었다. 해야 할 일이 쏟아졌다. SNS에다가 티켓팅했다고 공언한 게 엊그제인데, 이제 와서 취소했다고 올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워홀 후기를 찾아보고, 대충의 정보를 수집했다. 아무리 봐도 어설픈 상태였지만 완벽한 준비는 없다고 생각하며 차곡차곡 준비를 했다.
서른, 한 달 뒤엔 서른 하나. 시간은 상대성이라 나보다 앞선 사람은 항상 있었고, 나보다 늦은 사람 또한 항상 있었다. 그럼에도 많이 늦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 건 워홀 막차를 탈 나이였다는 점이고, 그 점이 곧 이른 편은 아니란 생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영어가 많이 늘면 영어강사를 해보고 싶다는 공상도 떨어봤다. 안되면 뭐 하던 치료사일 다시 해야지 하고서. 딱히 희망도 비전도 없다면서 바라는 건 참 많다. 욕심쟁이 도둑놈 심보는 정말 세계 챔피언이다.
'잘 됐으면 좋겠다. 좋은 친구도 사귀고, 집도 좋은 곳 구하고, 시급 빵빵한 일자리도 구해보고 싶다. 남들 바라는 만큼, 아니 그보다 조금 더 잘됐으면 좋겠다.'
어렴풋이 첫 직장 퇴사사유 중에 해외 경험도 말했던 거 같은데, 년수로만 이 년을 채우고 이제야 그 시작을 하게 된 거 같아 신기했다. 행동하지 않는 말은 소용이 없다. 공언(公言)이 공언(空言)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는 움직여야 한다. 움직이고 나면 신기하게도 무언가 할 게 생긴다. 호주를 가기로 했다면 티켓팅을 해야 한다. 늦었지만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자. 이보다 더 늦을 수도 있었잖아? (섬뜻)
<무한도전>때 명수 옹의 그 말이 떠오른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늦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시작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