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원을 하고 서둘러 준비해 도망치듯 상해로 떠났다.
어디든 도망치고 싶었다.
엄마 아빠는 등을 떠밀다시피 다녀오라며 두둑한 용돈과 전화 너머로 걱정 어린 온기도 쥐어주셨다.
'당신들의 지금'에는 '나'로 가득했다.
사는 게 바빠 언젠가의 대비를 놓치셨다.
가정을 꾸리고 가꾸느라 신경 쓰지 못한 착한 언니, 오빠는 때 아닌 직격탄을 맞았다.
'늙은 우리가 몰랐으면 젊은 너희라도 애를 챙겼어야 하지 않았냐'라고, 보험 하나 없었던 내 앞날을 한탄하시며 나이 터울 있는 막내의 병은 부모 자식 간의 훼방까지 놓았다.
상해에는 피붙이 같은 동생이 살고 있었다.
그곳의 겨울도 뼈가 시리도록 춥기는 마찬가지였다.
돌아와 명절이 되자 가족들이 모였다.
가지 않았다.
퇴원 후 딱 한번 모인 자리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방문을 잠근 후, 혼자 혈당체크를 하고 인슐린을 맞고 느지막이 자리에 앉아 정량의 밥을 떠서 먹었다.
기분이 묘했다. 어색했다. 나만 느끼는 공기의 흐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싫었다.
제일 허물없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게 싫었다.
그 후로 가족들 모임에 가지 않았다.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설 명절에 가지 않았다.
간격을 두고 본가에 갔다.
그리고 엄마 아빠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하지 말았어야 했다.
마치 죽을병에 걸린 사람 마냥 희망 없는 이 병에 대해
난 이제 나만 신경 쓸 테니 아빠는 엄마에게 신경 쓰라 했다. 나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아빠는 그러리라 약속하며 등을 쓸어주었다.
그 손길을 아직 기억한다.
아빠는 내게 있어 미운 사람이었다.
엄마에게 조금만 더 친절하면 좋았을 사람..
그럼 내가 엄마에 대한 집착이 덜 했을 텐데.
난 오롯이 아빠를 좋아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돌아가시고 난 후 애증이란 걸 알았다.
내 미움의 상대인 아빠라는 사람은 자신이 바뀌겠노라고, 자기만 믿으라고 했다.
그렇게 믿었다.
이제 남은 인생은 그러하시라고,
난 나만 신경 쓰겠다고.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내려오라는 연락이 왔다.
네가 좋아하는 고기를 사놓았다
제철 맛있는 과일을 주겠노라,
보고 싶은데 언제 오느냐..
요가학원 가야 해서.. 식단해야 해서, 아직은 좀..
아빠 생일인데 안 오냐?
가족들 다 모이잖아 나중에 따로 갈게.
여름휴간데 안 오냐?
나중에.. 나중에.
그렇게 난생처음으로 아빠의 생일과 휴가를 함께하지 못했다.
2013년 8월 3일. 토요일 늦은 저녁,
인사동 커피빈..
새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의 휴대폰으로.
티 내지 말고 나를 데려오라는 지령을 받은 것 같았다.
그날 오전 나는 가슴 섬유선종 제거수술을 또 해야 한다는 검사결과를 듣고 우중충한 하루를 벗어나고자 했다.
그 전화.. 표정관리 안 되는 네 얼굴과 말투.
모든 게 의심스럽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예리한 직감이 날을 세웠다.
아무리 물어도 대답하지 않자 다그치기 시작했다.
알기 직전까지 움직이지 않겠다고.
그 순간 생각했다.
'엄마만 아니어라. 엄마만 아니어라 엄마만..'
"아버지가... 돌아가셨대.."
머리가 멍했다. 거기까진 생각지도 못했는데..
'나 아직 아빠를 보지 못했는데?'
그럴 리가.. 믿지 못했다.
하지만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 제일 빨리 갈 수 있는 방도를 마련했다.
집으로 가 대략 검은 옷으로 환복을 하고 까만 손톱을 지웠다.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장례식장에 이러고 갈 순 없잖아."
마치 남의 일처럼..
네가 울었다.
그러고 정신이 퍼뜩 들었다.
오빠에게 전화를 해 "아니라고 해! 거짓말이라고 해! 빨리!"라고 소리를 쳤다.
왜 잊은 줄 알았던 그날의 모든 것이 분, 초를 가리지 않고 선명하게 되살아 나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그날을 생각하면 나는 잠시 그 자리에 머물렀다 오곤 한다.
장례식장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내가 본 건
웃고 있는 아빠의 영정사진이었다.
왜 하필 웃고 있담.. 너무나도 말간 웃음이다.
나중 제사를 지내면서 알았는데 아빠의 사진 속 표정은 웃고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아니다. 저건 내 아빠가 아니다.
나를 잡아줄 것 같은 형체는 어디 가고 사진 속에 갇혀만 있냐 말이다.
그리곤 기억이 산발적이다. 미친 듯이 나뒹굴고 발악을 하는 사이 엄마가 다가왔다.
"왜 이래? 엄마만 있어도 산다며! 정신 못 차리고!"
그래.. 난 엄마만 있어도 사는 아이인 줄 알았다.
차라리 죽어서 그리워하는 편이 낫다는 말을 내 입으로 뱉은 적이 있다.
그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울다 지쳐 눈을 깜빡이고 뜨길 몇 차례 반복했던 것 같았는데 3일이 흘렀다.
3분 같은 시간이었다.
장지를 하러 갔을 때 내리쬐는 볕도 뜨겁지 않고 덥지 않았다.
그저 내 눈앞에 보이는? 사라진 아빠가 영원히 저 흙 속에 묻힐 거라는 사실만이 내 머리를 후 드려 치고 있었다.
삼우제를 지내고 난 수술을 하러 서울에 올라왔다.
벌이라고 생각할게. 달게 받을게.
2년 후 다시 수술을 받게 됐다.
벌이라고 생각할게. 달게 받을게.
자기만 믿으라고 큰소리치더니..
영원할 줄만 알았다.
졸지에 아빠 없는 아이가 될 줄 몰랐다.
자기가 한 말 지킬 줄도 모르는 사람.
내가 온전히 사랑할 줄 몰랐던 미안한 사람.
아직도 내 꿈에 나와 웃고 싸우고를 반복하는 사람.
누군가는 보내주어라, 이만 놓아라-라고 하지만
그게 될 리가..
걸으면서 울고 밥을 먹으면서 울고 지나가는 비슷한 또래의 남자어른만 봐도 눈물이 났다.
아빠의 나이는 멈춰있다.
나이 든 아빠의 얼굴이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알지 못한다.
아빠의 주름과 내가 잘라주고 싶던 몇 안되던 길게 자란 눈썹, 수염 좀 자주 깎아 라는 잔소리를
여전히 하고 싶은데 왜 아빠는 없는가.
꼭 그렇게 서둘러 가야만 했을까.
자기만 믿으라더니 거짓말쟁이..
불행은 한꺼번에 온다더니 내 불행에 정점이 아빠가 될 줄이야.
그 언젠가의 꿈에 난 알았다.
답지 않게 환하게 웃으며 내게 뭐라 뭐라 말을 하는데 온몸의 세포가 일깨워주듯 꿈속의 난 느꼈다.
'아, 우리 아빠 죽었지.. 그럼 저건 가짜네..'
이건 꿈이다-하는 순간 깨버리고 또 울고 말았다.
그거 알아?
아빠.
말 못 해준 게 있는데, 나 사실 아빠 굉장히 좋아했나 봐.
아빠한테 잘해 준건 엄마한테 잘 하란 뜻이었지만 그렇다고 아빠의 선물을 소홀히 고른 적은 없어.
알잖아 아빠 까다로운 거.
아빠.
사실 내가 병에 걸리고 이것도 나름 걸릴만하다라고 생각했어.
할 말 없냐는 내 말에 전화기에 대고
“우리 딸 사랑해”라고 말했던 그 순간의 거리를 찰나를 난 몇 번이고 되새김질했거든.
아빠.
난 아직 TV에 나오는 세상 모든 '아빠'라는 존재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로 마주할 수 없어.
우리 참 지독한 관계로 만났지만 아빠의 딸이라서 행복했어.
살아있는 동안 미워해서 미안해..
이제는 엄마와 다른 가족들을 생각하며 살아가 볼 참이야.
내 불행의 끝은 여기까지라 생각할게.
우리 다음엔 더 사이좋게 만나자.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