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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여서 더러웠어 1

by vakejun


늘 5분 전에 도착한다.

지각은 하지 않는다.

그러던 내가 뛰기 시작한다.

제법 큰 회사에 다니면서 공복 질주는 시작된다.


전화가 온다.

"**씨, 내 출근전표도 찍어주라, 나 조금 늦을 것 같애" 박대리년이다.

넌 나의 양심도 지켜주지 않는다.


까라면 까야지. 처음엔 시키는 대로 해준다.


회사는 해외 레이블의 앨범을 국내 시장에 맞게 재편집해 내보내는 일을 했다.

일 자체로는 재미있었다.

워낙 음악을 좋아하기도 했고 신기하고 무엇보다

간지 난다.


디자인팀은 실장님을 포함 세 팀으로 나뉘었고,

난 미국의 큰 레이블(실장님 소속) 팀 중 하나에 들어갔다.

나보다 세 살 많은 박대리도 있다.


텃새.

박대리가 내게 주는 신고식.


박대리가 하는 편집을 등뒤에 손! 하고 서서 바라본다. 뒤에 서서 지켜보며 알아서 배우란다.


그래서? 이 작업 어떻게 하는 건데?


하루에 두세 시간, 일주일에 몇 번씩, 그리고 이어지는 잦은 인쇄소 심부름.


족저근막염에 평발, 무지외반증은 그 두세 시간을 버티기 힘들다.

치사하고 더러워서 빨리 배워 이 놈의 서서하는 벌 자세 그만둔다.


이것 봐라?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저 눈으로 쫓아가기만 한다.

다행인 건 그리 손이 빠른 타입은 아니었다.

시스템만 알면 금방인데 도통 말을 하지 않는다.

사수라며? 왜 안 알려 주는 건데..

내가 일을 덜어가야 너도 편한 거 아니었냐?


수시로 야근이 찾아온다.

미국과의 시간차로 파지는 주로 새벽에 들어온다.

발매 일정이 빠듯한 건이 들어오면 일단 무한 대기와 야근에 들어간다.


실장님께서 저녁 먹으러 가자-신다.

(이 소리가 제일 싫다. 집에 가지 말란 소리를 좋게 하시는 거다)

편집팀과 함께 아귀찜 가게의 방에 자리를 잡는다.

머리가 하나 빈다. 인쇄팀의 수장이 묻는다.

박대리의 행방을. 쫄다구가 대답한다.

"안 드신대요."라고 내가 말한다.


"그래, 우리 고상하고 우아한 박대리가 이런 걸 먹을 리가 없지~"


어린 내가 아둔했구나. 저 말의 뉘앙스를 빨리 알아챘어야 했는데.

밖에서 저녁을 먹고 오는 길이면 날이 잔뜩 선 박대리가 날 맞이한다.

가뜩이나 싫어하는 짓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한숨! 마우스질을 하며 한숨, 키보드를 두드리며 한숨,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다!


실장님의 저녁 먹자-는 이제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본능이 알려준다.

살려면 나가지 마!


"저 박대리님이랑 식사할게요. 드시고 오세요!"


그렇게 박대리를 챙기고 둘은 어색하게 앉아 자장면을 먹었다. 안 하던 짓을 한다.

"땡땡 레이블 애들, 뭐라고 안 해? 혹시나 괴롭히면 말해. 내가 커버해 줄게."

(너나..)

"네."


박대리가 원하는 건 그런 거였다.

자기편.


야근을 하면 총무팀에 야근수당을 신청한다.

업무일지 컨펌 후 시간당 페이를 합산해 다음 날 지급받는다.


박대리야, 너 남자친구가 LA 어쩌고, 마이클잭슨이 어쩌고 허세 부리지 않았니?

내 코 묻은 야근수당까지 가로채 가는 게

얍삽하니 전생에 넌 매국노였음이 분명하다.


이거뿐이면 섭섭하지?


아침이면 편집실, 필름이 나오는 기계 앞에서 전날의 작업을 체크한다.


저런.. 곧 발매할 유명 앨범재킷 앞뒤가 바뀌었다.

간만에 행차한 사장님이 노발대발하신다.


"이거 누가 작업했어? 필름 하나에 얼마 하는지 알고 이러는 거야?"

몇 백 원에 곰 같은 몸을 부르르 떨자 다들 기죽은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난 어안이 벙벙하다.


"**씨! 내가 확인하고 넘기랬잖아! 왜 그랬어?!"


응? 지금 나 독박 쓴 거야?!!

사장은 매국노의 말에 속아 신입의 실수에 대놓고 뭐라 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어이없는 난 굳어버렸다.


편집팀 수장이 그랬다.

정신 바짝 차리라고.


이게 뭔 일일드라마 같은 상황?


'미안하다'를 뺀 사과 비슷한 시늉을 뒤에서 해왔지만 너는 내게 전혀 미안하지 않다.

사장에게 찍히지 않아 다행인 얼굴이었다.


실장님이 나를 따로 불렀다.

박대리의 '대리가 된 썰'을 얘기해 주신다.


박대리는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았고 신입으로 들어와 여기서 3년을 버텼으며 그게 쉽진 않았을 거다, 그 후 새로운 디자이너들이 오자 사수가 되었고 명목상

'대리' 직분을 주었으며 시간이 만들어 낸 자리라고 했다.


존버.. 네가 승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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