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 부리기 좋은 계절이 왔다.
걸쳐 입는 걸 좋아한다.
더우면 벗고 추우면 입을 수 있는
기능적으로 멋 내기 딱 좋은 계절.
하루의 일과 중 혈당체크와 인슐린주입 단위,
그날의 동선과 이동시간, 누구와 어디를 함께하고 먹었는지를 불렛저널처럼 이모지를 써가며 입력하고 나면 감정을 뺀 그날의 '일과기록'이 남는다.
벌써 이 기록을 한지도 8년째구나.
좀 대단하면서 징글맞다.
나의 행방은 주로 사람 많은 곳을 피해 다니는 편인데
호기심이 많으니 새로 생긴 커피바와 브런치카페는 예외이나 크게 홍대, 성수동은 절. 대. 가지 않는다.
기를 빨리고 오기 때문이다.
두통이 오고 어지럽고
아찔하고 개성 강한 패션감각에 동공이 비명을 지른다.
한산한 오후,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성수동을 가보기로 한다.
이쯤 되면 도전이다.
기록을 뒤졌다.
21년 5월 8일, 마지막 행방이다.
핫플에 질렸고 발 디딜 틈 없는 좁은 길거리도 무엇에도 뜻이 없었지만 괜히 한번 깔롱 부리고 나서보기로 결심했다.
최고기온 24도.
셔츠에 환장하는 나로선 오늘이 딱 제격이다.
올블랙을 선호하는 내가 어쩐 일로 산 쨍한 단색의
슈프림 셔츠를 입고, 버뮤다팬츠에 좋아하는 볼캡을 썼다.
내가 봐도 만족스럽다.
그렇지 않다면 외출은 없다.
회사 다닐 때 출근도 마찬가지였다.
그날의 착장이 내 기분을 좌지우지하는 건 분명했다.
이 정도면 성수에 가도 '가슴 아픈 패션'은 아니다.
뭐, 자랑 같아서 말하는 거지만 옷은 잘 입는 편이다.
지난 서울숲의 기억은 좋았는데..
성수동 거리는 도착하자마자 울렁증이 도졌다.
이제는 외국인들의 관광 필수코스라는 것도 파악했어야 했다.
1분 단위로 나타나는 인생 네 컷도 거기에 바글거리는 사람들도, 들어가고 싶은 샵도 카페도, 그 어느 하나 날 꼬시는 곳은 없었다.
혼미한 정신을 붙잡고 떨어지는 혈당을 보며 딱 30분 걷고 그곳을 벗어났다.
3년 만에 왔으니 이걸로 되었다.
이 기억이 가물거릴 즈음, 또 3년이 지나고
여름 오는 24도가 아닌 겨울 오는 24도쯤에 다시 들르기로 했다.
대충 반가웠고 얼마간은 안녕-
깔롱 부리고 싶을 때 셔츠자락 휘날리며 나타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