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아직 덥다. (사실 너무 덥다) 엄마는 늘 절기가 얼마나 정확한지를 설파하셨지만, 점점 절기가 힘을 못 쓰고 있는 것 같다. 물론 하늘이 더 파래지고 좀 높아지는 것 같긴 하다. (물론 이것도 더운 날이 사그라들기를 바라는 내 강한 바람이 만들어 낸 착각이기 쉽다.)
윌리엄 트레버의 소설《여름의 끝 Love and Summer》에는 여름 한 철의 사랑 얘기가 나온다. 여름 하면 흔히 ‘뜨거운’, ‘불타오르는’ 같은 단어를 떠올리지만, 소설 속 사랑은 느리게 잔잔히 이어지다 여름이 끝날 즈음 아무도 모르게 끝이 난다. 그래서 더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어른의 사랑이 많이들 그렇지 않나. 서로의 무엇이 되지 않은 채 잠깐 스쳐 지나는 인연으로 영원히 사라지는...
양을 아껴서 키우던 양이 죽으면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는 농부, 집에서 키운 닭이 낳은 달걀을 일주일에 한 번씩 읍내로 배달 가는 아내, 자주 실수하는 문구점 영업사원이 무사히 은퇴해서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그의 실수를 모른 체 바로 잡아주는 이웃 사람들... 소설 속 동네 사람들은 무더운 여름날을 버티고 있는 우리 동네 노인들을 연상시킨다. 불타오르는 청춘과는 거리가 아주 먼 여름의 모습이다.
덕분에 여름이 지닌 각양각색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었다. 여름은 인생 한가운데 자리 잡은 이글거리는 청춘만은 아니었다. 좌절, 낙심, 희망, 사랑... 상처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담담하게 살아가려는 지금 내 모습 또한 여름의 모습일 수 있구나.
어쩌면 여름의 끝은 이글거리는 한가운데보다 더 근사한 시절일지 모르겠다.
곧 저 그림처럼 원숙한 아름다움을 뿜어낼 시간을 품고 있으니 말이다.
8월도 끝으로 성큼 다가서고 있고, 속도를 늦추었던 일상은 다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꼭 열심히 살아 낸 덕에 이것저것 수확하는 가을이 아니어도 좋다. 자연 하나만으로도 저렇게 풍성하고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으니 여름의 끝을 버티고 가을을 맞을 이유는 아주 많다.
그렇게 한해를 또....
스쳐 지나는 이런저런 인연을 기억 속에 품고 또 한해를...
바다는 고요하고 가을 아침의 싸늘한 기운이 남아있다. 무엇을 기억하게 될지 너는 안다...
허술한 기억이 무엇을 간직하게 할지 너는 안다.
-윌리엄 트레버, 여름의 끝, 291
박은성, <가을과 단풍>, 캔버스에 아크릴, 72.7 x 60.6 cm,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