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살짝 묻은 소나무 한 그루가 꼿꼿하게 서 있다. 소나무 하면 절개와 지조 같은 걸 떠올리게 되지만, 악귀를 퇴치한다고 해서 무덤가에도 많이 심었다고 한다. 풍성하게 가지를 뻗고 나뭇잎이 주렁주렁 달리는 풍채 좋은 나무도 아니고, 저런 가냘픈 나무가 악귀를 어떻게 물리칠까 싶은데... 계절이 바뀌며 잎이 다 떨어지는 활엽수들과는 달리 겨울 눈 속에도 모습이 별로 변하지 않는 걸 보면, 진짜 힘 있는 나무인 것 같기도 하다.
어느 망자를 보낼 때 저 그림을 옆에 두고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하셨던 분이 있었다. 보내는 가족이나 떠나는 망자에게 위로가 됐다면 그림은 역할을 백배 이상 한 걸 거다.
작년 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늙고 병들어 가면서 차츰차츰 세상과 멀어지는 아버지를 몇 년 동안 지켜봐야 했었다. 그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버지는 당장이라도 여행을 떠나실 거란 생각도 많이 했지만, 막상 떠나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구체적인 단어를 떠올리지 못할 만큼 힘들고 아팠다.
보통 죽음은 남겨진 누군가의 인생을 많이 변화시키기도 하는데, 난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일상을 살고 있다. 좋다, 싫다, 희망차다, 불행하다 같은 느낌 없이 그냥 사는 삶. 그런 일상을 차분히 살고 있다는 데 위로를 받으면서 변함없이 하루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아버지를 보내고 알게 된 것도, 변한 것도 있긴 하다.
아버지는 사라졌지만, 결코 사라진 게 아니라는 거다.
아버지.
나는 아직도 순간순간 내 안에서 아버지를 느낀다.
분명 내가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아버지를 기억할 거다.
그러니 아버지는 죽지 않고 내 속에 살아있는 거다.
내 근본 뿌리.
죽음을 멀고 무섭게만 느끼지 않게 됐다는 변화도 생겼다. 누구나 한 번은 가는 길. 시작했으니 반드시 끝도 내야 한다. 살아야 할 이유가 많은 이 세상에서 하루하루를 반듯하게 살다 때가 되면 가볍게 가는 거다. 훌훌.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훌훌.
아버지는 물과 불과 공기로 흩어져 무로 돌아갔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좋다는 어떤 곳으로 옮겨가 평안을 얻었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도 결코 사라진 게 아니었다.
삶과 죽음은 늘 그렇게 한편이 맞닿아 있는 걸 거다.
그 또한 위로다.
박은성, <눈 묻은 소나무>, 캔버스에 아크릴, 40.9 x 24.2 cm,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