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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 Jul 28. 2023

눈을 뜨는 순간

덥다덥다덥다덥다덥다. 

그래서 굳이 겨울 산이다. 


멀리 보이는 산은 눈에 덮여 뭉개진 듯 보이지만 가까이 보이는 산은 산세가 험하다. 

눈이 묻어있지만, 본래의 자태를 전혀 잃지 않았다. 누구도, 무엇도 쉽게 허락할 것 같지 않다. 

그래도 봄이 오면서 눈이 녹는 때가 올 거다. 

그땐 눈 쌓인 겨울 산에서 전혀 보이지 않던 것이 새롭게 보일지도 모른다.

새롭게 보이는 순간...


에피파니(epiphany, 신을 만나는 순간)는 기독교 용어였지만, 지금은 일상에서 경험하는 특별한 순간을 표현하는 의미로도 많이 쓰인다. 눈이 번쩍 뜨이는 개안의 순간이랄까? 그런 순간은 꼭 특별한 경험을 통해서만 만나게 되는 건 아닐 듯하다. 어쩌면 늘 경험하는 똑같은 현실에서도 에피파니를 경험하게 되는 순간이 있을지도. 그렇다면 다시 태어나는 것 같을까?


난 부활 이야기가 좋다. 어둠에서 빛을 발견하고, 두려움 때문에 잊고 있었던 약속을 기억해 내고 용기를 얻는 순간 이어서다. 탄생은... 뭐 굳이 힘든 세상에 애써 오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부활은 좀 다르게 느껴진다. 이미 와 버렸으니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는데... 그 와중에 새로운 빛을 보고 다시 태어난 듯 용기 있게 산다면 남은 생은 선물 같지 않을까 싶어서다. 


하지만 무겁게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빛을 보기는 참 어렵다. 보통은 어둠 속에서 헤매기만 하다 더욱더 깊은 어둠으로 침몰해 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에 우리는 불행하다. 어떻게 하면 일상의 어둠 속에서 새로이 눈을 뜨는 에피파니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을까? 덕분에 평범한 일상에 의미를 더하며 살 수 있다면...


지금껏 보아 온 눈앞의 세상이 어둡기만 했다면 다르게 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꽁꽁 얼어붙어 생명은 전혀 없을 것 같은 산에서도 한순간 밑동에서 올라오는 푸른 생명의 빛을 감지할 수 있는 것처럼, 어쩌면 안 보이던 빛은 다른 방향으로 눈길을 주어야 보이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아직은 다르게 보는 방법을, 어둠에서 빛을 찾는 방법을 잘 모르겠다. 


그래도,

거창하게 부활까지는 아니더라도 눈을 떠 새로운 빛을 보는 순간 한 번쯤은 꼭 경험해보고 싶다. 미로처럼 꼬여있는 인생사들이 사실은 단순하게 연결돼 있었다는 것을, 어느 한순간도 의미 없는 순간은 없었다는 것을 설핏하게라도 깨닫게 되는 순간이기를.


아마 그땐 깨닫게 되지 않을까?

그런 특별한 순간이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아 눈을 떴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걸 말이다.


박은성, <눈 내린 설악산>, 캔버스에 아크릴, 90.9 x 72.7 cm.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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