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샅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 북덕불이라도 담겨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지두 않고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 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 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러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시인 80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로 뽑혔다는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신의주 남쪽, 유동 마을, 박시봉 씨 집에서 셋방살이를 시작한 ‘나’의 추운 겨울과 외로움이 날것처럼 느껴지는 백석의 시. 혼자 남아 지나온 날을 성찰하는 추운 겨울,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그리는 마음은 그의 외롭고 무겁고 고달픈 현실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무력감을 버티고 내일까지, 모레까지 살아야 할 희망을 주긴 했을까?
날이 너무 덥다.
눈 쌓인 유동 마을을, 그리고 환상처럼 보일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상상해 본다.
숨을 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