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쿳시의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소설은 작가의 분신인 것 같은 유명 작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호주의 작가로 나오는데, 남아프리카 출신인 존 쿳시는 2006년부터 호주에서 살고 있다)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강연한 내용을 위주로 채워져 있으며, 소설의 전통적인 플롯을 따르기보다 작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의견 전개를 중심으로 한 에세이 형식을 더 취하고 있다.
약간의 소설적 서사 (엘리자베스 코스텔로가 주인공으로 자신과 가족의 얘기가 일부 나옴)와 에세이적 의견 개진이 결합한 다소 생소한 형식으로 전개되다 보니 책의 1/3 정도를 읽을 때까지 계속 앞뒤 페이지를 넘기며 제대로 읽고 있는지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다소 급진적? 인 듯한 의견을 거침없이 펴다 결론 없이 질문만 남긴 채 끝내버리는 결코 친절하지 않은 강연자(논쟁자)였다. 하지만 그녀의 주장들이 무척 흥미로웠기 때문에 중간에 책을 놓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강연회 내용 중심으로 1강부터 8강까지 리얼리즘에 대한 작가의 견해, 동물의 생명권 (심지어 인격권이라 할 수 있다 주장), 기록 전승과 구비 전승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아프리카의 소설, 아프리카에서 기독교를 통해 나타나는 종교의 문제, 소설 속의 악, 신과 에로스, 믿음의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리얼리즘은 관념을 편하게 여겼던 적이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리얼리즘은 관념이 자율적 존재를 지니지 않으며 사물 속에만 존재할 수 있다는 관념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서처럼 리얼리즘이 관념을 두고 논쟁할 필요가 있을 때 그것은 상황-시골에서의 산책, 대화-을 발명하는데, 그 속에서 인물들은 경합하는 관념들을 말로 표현하고 그림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그 관념들을 체화한다. 체화 개념은 중추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그런 논쟁에서 관념은 자유롭게 떠다니지 않으며 실로 그럴 수가 없다.” (17)
“『율리시즈』전체에 걸쳐서 몰리는 자기 흔적을 남기는데, 마치 발정기의 암캐가 암내를 풍기고 다니는 것 같아요. [...] 제가 조이스에게 도전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어떤 작품들은 창의성이 아주 풍부해서 결국에는 쓰다 남은 재료가 많이 생겨나는데, 마치 이 재료가 저를 좀 데려가서 당신 자신의 뭔가를 만드는 데 써주세요, 하고 청하는 느낌이에요.” (22)
“그런데 제 어머니는 남자였던 적이 있어요. 개였던 적도 있죠. 그분은 다른 사람들 속으로, 다른 존재들 속으로 생각해 들어갈 수 있어요. 어머니 책들을 읽어봐서 알아요. 그분은 그럴 능력이 있죠. 픽션에서 제일 중요한 게 그거 아닌가요. 픽션이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빼내서 타자의 삶 속으로 데리고 들어간다는 것?” (36)
“서구의 입장에서 우리 아프리카인은 그저 야만적이지 않으면 모두 이국적이지요. 그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67)
“영국 소설을 일차적으로 영국인이 영국인을 위해서 써요. [...] 그런데 아프리카 소설은 아프리카인이 아프리카인을 위해서 쓰지 않아요. 아프리카 소설가는 아프리카에 대해서, 아프리카적 경험에 대해서 쓸지 몰라도, 내가 볼 때는 글을 쓰는 내내 자기들 책을 읽어줄 외국인을 어깨너머로 힐끔거리고 있는 것 같단 말이에요. 그이들은 좋든 싫든 해석자의 역할, 자기 독자들이 아프리카를 해석해 주는 역할을 받아들인 거예요. [...] 제가 보기에는 이게 당신들한테 있는 문제의 근원이에요. 글을 쓰는 동시에 아프리카성을 연기해야 하는 것 말이에요.” (72)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들을 몇 권 읽었던 경험 덕분인지 엘리자베스가 주장하는 동물의 생명권과 육식에 대한 윤리적 고민의 이슈는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동물에 대한 무차별적 살육과 홀로코스트가 도덕성과 중요성에서 대등하다는 그녀의 주장은 내게도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당연히 그녀가 그 얘기를 했던 강연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거부감을 일으켰고 그녀를 반유대주의자로 낙인찍었다. 계속해서 그녀는 잔혹한 동물 학대는 상상력과 공감 능력의 부재에서 기인한 것이라 설명하며 데카르트적 이성주의, 기계적 이성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함 being을 체화하는 감각이 필요하다는 윤리적 전환을 역설했다.
다음 무대는 수녀인 그녀의 언니가 평생 봉사하고 있는 남아공의 줄루란드였고 그녀는 서구의 지적·문화적 전통이 아프리카에서 자리 잡는 과정이 고대 신앙이 기독교에 패한 것과 닮았다고 역설한다.
“그러니까, 오, 창백한 갈릴리 사람이여, 그대가 승리했도다.” (193)
“줄루란드에 그런 순간에 필적하는 어떤 것이 있을까? 황홀한 것과 심미적인 것의 저 아찔한 혼합은 없어. 그런 건 인간의 역사에서 단 한번, 르네상스기 이딸리아에서 일어나는데, 고대 그리스에 대한 인본주의자들의 꿈이 까마득하게 오래된 기독교 형상들과 의식들을 침범하는 때지.” (199)
자신도 독자들에게 전기충격 같은 충격을 안길 표현을 찾을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쓰기를 거듭했던 작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노년기에 접어든 엘리자베스는 한 작가가 묘사한 홀로코스트의 장면이 악을 불러들였다고 평한다.
“스토리텔러가 병을 열면 지니가 세상에 풀려나고, 그를 다시 병 속에 집어넣으려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녀의 입장, 그녀의 수정된 입장, 삶의 황혼에 그녀가 취하는 입장은 지니가 병 속에 그냥 있는 게 대체로 더 낫다는 것이다.” (220)
“악마는 히틀러의 교수형 집행인을 통해 폴 웨스트(작가)에게로 들어갔으며 그다음 웨스트는 자기 책에서 악마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그를 세상에 풀어놓은 것이다.” (221)
“어떤 것들은 읽기에 또는 쓰기에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달리 표현하면, 저는 예술가가 금지된 곳들로 들어가는 모험을 감행함으로써 많은 것을 위태롭게 한다, 특히 그 자신을, 어쩌면 모든 이를 위태롭게 한다는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228)
악을 세상에 까발리지 말라, 그런 행위 자체가 악을 세상에 풀어놓는 행위다...
그렇다면 인류가 저질렀던 수많은 악행이 세상에, 역사에 알려지지 않은 채 묻혔을 것이다. 그게 옳은 일인가? 엘리자베스의 모든 주장은 모호하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논란을 가져올 여지가 아주 많다.
마지막 장. 그녀는 연옥에 있다. 그곳에서 그녀는 문을 통과하지 못한다. 한 번, 두 번 시도할 때마다 연거푸 실패하며 재판관들 앞에서 질문을 받는 그녀는 자신을 변호한다. 자신은 그저 서기일 뿐이었다고. 하지만 왠지 잘될 것 같지 않다고 느낀다.
어쨌든 그녀는 연옥의 합숙소를 벗어나 광장으로 나가고 싶다. 그 광장이 어디든.
“저는 작가이고, 제가 쓰는 것은 제가 듣는 것입니다. 저는 보이지 않는 것의 서기, 오랜 세월에 걸쳐 존재한 많은 서기들 중 하나입니다.” (262)
“좋은 서기는 믿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그 직무에 부적합합니다. 서기는 다만 부름을 기다리며 준비가 되어 있으면 됩니다.” (262)
“신은 그냥 놓아두는 편이 좋습니다. 바라건대 신도 저를 그냥 놓아두면 좋겠고요.” (270)
“이제 그것이, 평생에 걸친 글쓰기의 고역이 완전히 끝났으므로, 그녀는 기만당하지 않을 만큼 침착하다고, 심지어 차갑다고 믿어지는 시선으로 그것을 돌이켜볼 수 있다. 그녀의 책들은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될 수 있는 한 명료하게 밝힐 뿐이다. 좀 더 겸손하게 말하면, 그 책들은 한 사람이, 수십억 중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밝힌다. [...] 그녀의 책들은 그녀보다 더 잘 조립되어 있다고 그녀는 믿는다.” (273)
그녀는 과연 저 연옥의 문을 열고 광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러니까... 이런저런 굵직한 질문과 색다른 경험을 남긴다.
“문이 하나만 있다고 믿는 거예요?” (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