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by 새벽

(유시민, 김세라 글, 2026)


이 책은 93세의 강순희 할머니가 유시민 작가와 진행한 인터뷰와 2011년 4.9 통일평화재단과 했던 구술 기록 등을 바탕으로 제작된 자서전이다.


할머니는 “박정희가 저질렀던 수많은 사법살인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짓”(14)으로 알려진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1975년 4월 9일 사형당한 8인 중 한 명인 우홍선 님의 아내이다.

한홍구 교수는 『사법부』(2016)에서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974년 4월 3일 박정희는 ‘민청학련’이라는 불법단체가 반국가적 불순세력의 배후 조종 아래 ‘인민혁명’을 획책하고 있다고 ‘담화문’에서 주장했다. 이어 4월 25일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민청학련의 배후에 ‘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 조직’이 있다며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을 구속. 수사 중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1년 후인 1975년 4월 9일 박정희 정권은 인혁당 관련자 여덟 명의 사형을 집행했다. 이날 대한민국 사법부도 같이 죽었다. 국제법학자협회에서는 이날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불렀다.” (105)


“여덟 명이 사형을 당한 것은 바로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공산 비밀조직을 구성하자는 회합 결의를 한 사실’이라는 혐의 때문인데 검찰 측이 제시한 유일한 증거가 바로 피고인들의 자백이었다. 피고인들은 법정에서 이를 부인했지만, 군법회의는 공판조서를 허위로 작성했고 대법원은 날조된 공판조서에 의거해 사형을 확정한 것이다.”(110)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발췌.


유: 어머니 인생 이야기를 누구한테 들려주고 싶으신 겁니까?,

강: 모두한테요. 같은 시대 산 사람들한테도, 젊은이들한테도 말해주고 싶어. 이것이 조선의 역사다. 한국의 역사다. 우리의 역사다! 내가 산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에요. 우리나라 역사가 이렇게 흘러왔다는 걸, 국민들이 이렇게 고생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예요. 나는 어려서 하얼빈에서 살았고, 이북에서 공부했고, 전쟁 나서 피난 왔고, 여기 와서 또 난리가 나서 남편이 죽고, 그랬는데 나중에 다시 무죄받아서 재단도 만들었다, 거기까지요. 17-18


유: 이 일이 어머니한테 어떤 의미가 있는 거죠?

강: 내가 해야 하는 마지막 일이니까요. 우리 역사를 적는 일은 중요하고 값어치 있어요. 이것만 하면 할 일을 다 했다는 마음이 들 것 같아요. 잘 써주실 거니까. 난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그러면 행복할 것 같아. 지금까지도 불행하진 않았어요. 18


강: 그냥 같이 있으면 좋았고, 얘기하면 재미있었지. 그러니까 만났고, 마음에 드니까 결혼한 거야. 계산이 없었어요, 진짜. 사람들은 이해 못 할 거야. 78

강: 나는 남편한테 불만 없었어요. 아내로서 대접받고 살았어요. 남편 사건 터져서 고생을 했지만 남편 잘못이라고 생각 안 했어. (중략) 불만 가질 게 뭐 있냐고, 살면서 문제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그 사건 때문에 나도 분해 죽겠다고, 세상하고 싸우느라 정신없다고, 옥에 갇힌 사람한테 내가 뭐라 하겠냐고. 91


강: 내가 나중에 옥바라지할 때도 옷 잘 입고 선글라스 끼고 다녔지. 이것들이 사람 무시하니까. 무슨, 못살아서 이북에서 왔다느니, 빨갱이라느니 어쩌니 하면서 얕잡아 보니까,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당당하게 하려고 그렇게 한 거예요. 109

강: 옥살이나 좀 하고 나올 줄 알았어요. 죽일 줄은 몰랐어. 정말. 죽이기까지 할 줄은 몰랐어. 119

강: 그놈들이 얼마나 심하게 고문을 했는지 의사가 와허증이란 걸 내줬더라고, 누워 있어도 된다는 거야. (중략) 상고하면서 그 증명서를 같이 냈는데, 마음이 얼마나 아프던지··· 121


2심까지 사형 선고가 나오자, 그녀는 아래의 호소문을 써서 명동성당에서 읽었다.


우리들은 살고 싶습니다. 평화롭게 살고 싶습니다. 저희들은 10년 전에도 없었고 현재도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조작된 인혁당에 묶여 사형 선고를 받은 피고인들의 아내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인혁당을 조작하여 북괴에 이롭게 하는 것은 무슨 법, 무슨 조에 해당하는지 만천하에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부디 저희들의 남편을 정치 제물로 이용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 주십시오. (중략) 죽이고 난 다음에는 살릴 수가 없습니다. 이 절실한 호소를 모른 채 묵인함으로 저희들의 남편을 제물로 바치려 하는 자들과 같은 편에 서는 결과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중략) 저희들의 남편은 주교도 아니요, 변호사도 아니요, 시인도 아니요, 교수도 아니요, 목사도 아닙니다. 인혁당원도 결코 아닙니다. 이름 없고, 힘없고, 짓눌린, 선량한 대한민국의 한 국민입니다. 더 이상 저희는 사형이라는 몸서리쳐지는 말을 들을 기력이 없습니다. 135-136


유: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설쳤던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싸우셨다는데, 그 무서웠던 시절에 그렇게 싸울 힘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강:남편을 사랑했으니까. 그건 뭐, 말할 필요도 없죠. 그 사람 없이는 못 살 것 같았어요. 내 숨이 끊어질 것 같았어요.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그 힘으로 그렇게 쫓아다닌 거였겠지. (중략) 팔자 한탄하지 않고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 갈 데도 많고 할 일도 많았어요. (중략) 구명 운동은,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는 만큼 했어요. 194-195


강: 남편 죽고 나니까 이놈의 세상이 사람 사는 세상 같지가 않았지. 사건을 조작해서 죄 없는 사람들을 결국 죽였잖아요. 이건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닌 거야. (중략) 사람들이 다 이상해 보이고, 몇 달을 누워있었어요. 못 일어나겠더라고. 197


유:사람들이 우 선생님과 인혁당 사건을 어떻게 알고 기억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강:박정희 정보부가 사건을 조작해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였지. 억울하게 죽은 건 맞아요. 그렇지만 뜬금없이 붙잡혀 간 건 아니었어. 물론 인혁당재건위 같은 건 있지도 않았어요. 다만, 통일을 위해서 애쓰고 노력했던 사람들이었다는 거, 그건 알아줬으면 해. 246


강: 김수환 추기경님, 오글 목사님, 지학순 주교님, 최기식 신부님, 원주하고 인천의 신부님들, 목사님들, 다 우리 편이었어. 공덕귀 여사도 고맙고요. 내가 박정희 때문에 억울한 일 당했지만 사랑도 많이 받았어요. 생각해 보면 난 어렸을 때부터 사랑 참 많이 받았어. 부모 사랑도 많이 받았고, 남편 사랑도 많이 받았고, 직장 상사들한테도 사랑받았어. 내가 참 인덕이 많은 것 같다. 251


유: 살면서 제일 좋았던 하루, 또는 제일 좋았던 시간을 떠올릴 수 있으신가요?

강: 우리 신랑하고 데이트할 때가 제일 좋았지. 범어사 갔을 때.

강: 아무 여한이 없어요. 오늘 밤에 죽는다 해도 괜찮아. 남편 일로 좀 힘들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했으니까. 신랑도 잘 만났고, 사랑도 잘했고, 남편 일로 싸울 때도 잘 싸웠어요. 자기한테 주어진 것을 극복하면서 사는 게 인생이잖아요. 나한테 주어진 환경과 조건에서 내 힘껏 노력하고 살았어요. 최선을 다했어요. 남편 죽었을 때는 막 같이 죽고 싶었지. 그런 생각이 든 순간이 여러 번 있었어. 그렇지만 아이들 위해 살아야겠다 싶어서 고비를 넘겼어요.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262


**

내게 이 글은 70년간 계속된 지독한 사랑 얘기로 읽혔다.

지나치게 감상적인 얘기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렇게 읽혔는데 어쩌란 말인가.


강순희 할머니의 말처럼 이 얘기는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한 장이다. 힘겨운 시절을 강하게 버텨온 한 여인의 역사이고, 엄혹한 시절, 끔찍한 사법살인으로 희생당한 이들을 통해 드러나는 부끄러운 역사의 한 장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관통했던 건 할머니가 단단하게 쌓아 올린 삶에 대한 사랑이었고, 평생 존경하고 사랑하고자 했으나 45세라는 나이에 국가에 의해 살인당한 남편을 향한 사랑이었다.

기억이 다 사그라들기 전에,

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자신이 겪어 온 그 간절했던 한순간 한순간을 읊으셨을 강순희 할머니께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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