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첫 편지'

by 또 래 호태

들켜버린 마음_조바심


들뜨지 말자고 조심했건만, 그만 들키고 말았다.
출입문을 여는 동작이 서툴러서였을까. 평소보다 종소리가 컸다.


동이는 그 차이를 바로 느꼈다.
평소와 다른 종소리. 결이 달랐다.


누구지?


그 순간, 헬멧이 먼저 보였다.
헬멧 아래의 얼굴.


핫 카페라테!


오늘은 왜 헬멧 차림이지?


동이가 궁금해하는 사이, 그는 한 손에 커다란 보냉백을 들고 있었다.
저걸 왜…?


그는 헬멧을 벗지도 않은 채 카운터 옆 단체석 긴 탁자에 보냉백을 올려놓았다.
서두르는 사람의 동작이었다.


지퍼가 열리고, 커다란 반찬통 하나와 작은 통 두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통들을 조심스레 꺼내 들고, 동이를 향해 말을 건넸다.


“이거…”


동이가 되물었다.


“그게 뭐예요?”


호태가 짧게 숨을 고르고 말했다.


“열무김치를 담갔어요. 김치 담글 시간, 없으신 것 같아서.”


동이는 눈이 조금 커졌다.


“이렇게나 많이요?”


호태는 작은 통을 하나 더 들어 보이며 덧붙였다.


“그리고 이거요. 열무는 곁들이면 제맛이 나거든요.”


그가 통을 열어 보이지는 않았다.
대신 말로만, 급하게 설명했다.


“삶은 감자 세 개. 삶은 옥수수 두 개.”


동이는 통과 그의 헬멧을 번갈아 봤다.


“이걸… 왜 저한테요?”


호태는 눈을 잠깐 피했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식사를 대충 때우신다고 해서요.”


그리고 그는 조심스레 안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봉투 하나를 꺼내, 동이에게 건넸다.


편지?


동이가 봉투를 받는 순간, 호태가 덧붙였다.


“말로 하면… 좀 쑥스러울 것 같아서요.”


동이는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머리를 붙잡을 새도 없었다.
호태는 봉투를 건네고는, 도망치듯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헬멧을 벗지 않은 이유가, 이제야 짐작됐다.
얼굴을 오래 두면 들키니까.
표정을 들키기 전에, 빠져나가려는 거였다.


호태는 출입문을 밀치듯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 세워 둔 자전거를 잡는 동작이 위태로웠다.
서두르느라, 아니면 마음이 먼저 달려가느라.


동이는 그대로 서 있었다.
탁자 위의 보냉백, 반찬통들, 그리고 손에 쥔 편지봉투가
방금 지나간 사람의 흔적처럼 남아 있었다.




던지고는 가버린 남자


동이는 헛웃음이 났다.


뭐야,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순식간에 벌어진 일. 그런데 증거는 분명했다.
커다란 반찬통 하나, 그 옆의 작은 통 두 개.
그리고 자기 손에 들린 편지 봉투.


동이의 시선은 편지 봉투보다 먼저 반찬통으로 갔다.
조심스레 뚜껑을 여는 순간, 눈보다 코가 먼저 반응했다.


익숙한 냄새.
맛있는 김치에서만 나는, 그 ‘정답’ 같은 향기.


동이는 숨을 한 번 삼켰다.
그리고 뚜껑을 완전히 열었다가, 잠깐 멈췄다.


뭐야… 이 비주얼은.

냄새가 너무 인상적이어서였을까.
때깔을 보는 순간 당황이 먼저 올라왔다.
약간 허여멀건한 빛.
순간 의구심이 폭발했다.


남자가 담가서…?


망설이는 손.
동이는 열무 줄기 한 가닥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마치 증거물을 다루는 것처럼, 아주 작게 한 입.


그 순간, 머릿속이 환해졌다.
불이 켜진 것처럼, 감각이 또렷해졌다.


기가 막힌 맛.


동이는 다시 반찬통을 봤다.
이걸… 저 사람이 직접 담갔다고?


그런데 왜, 비주얼은 또 이래?


동이는 작은 통 두 개로 시선을 옮겼다.
뚜껑을 여니 삶은 감자 세 개가 먹음직스럽게 담겨 있었다.
아직 김이 났다. 막 쪄낸 정성이었다.


다른 통.
옥수수 두 개에도 온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서두른 마음이 이해됐다.
헬멧을 벗지 않은 채 들어왔던 이유도, 이제 선명했다.
그는 시간을 아끼려 한 게 아니라 온기가, 온기를 담은 마음이 새는 걸 막으려 했던 거다.


동이는 서둘러 뚜껑을 닫았다.
커피 향이 그윽해야 할 매장에 김치 냄새가 먼저 번지는 건 곤란했다.
김치는 우선 갈무리. 확실하게.


그리고 이제… 편지.


동이는 봉투를 내려다봤다.
세 번째 받는 ‘첫 편지’라는 감회가, 조금 늦게 밀려왔다.


그때 손님이 들어왔다.
주문이 떨어졌다.


동이는 편지를 카운터 계산기 옆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마치 “나중에, 반드시”라는 표시를 해두듯이.




세 번째 첫 편지_잊었던 설렘


동이의 시선이 다시 편지봉투로 돌아가기까지, 마음은 한 번에 가지 못했다.
김치 냄새가 먼저였고, 통의 온기가 먼저였고, “저 사람이?”라는 물음이 먼저였다.
편지는 그 뒤였다. 늘 그랬다. 편지는 항상 ‘나중’에 와서, ‘먼저’였던 것들을 조용히 뒤집어엎었다.


손님 주문을 받는 동안에도, 동이는 카운터 옆에 놓인 봉투를 계속 의식했다.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쓸수록 더 또렷해지는 존재감.
하얀 종이의 두께가 아니라, “사람이 남긴 마음”의 두께가 보였다.
동이는 커피를 내리면서도, 동전과 영수증 사이로 그 봉투를 자꾸 확인했다.
마치 살아 있는 물건처럼, 그 봉투가 자리를 조금씩 넓혀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예상치 못하게 ‘현재’보다 ‘과거’가 먼저 찾아왔다.
편지봉투 하나가 시간을 세 갈래로 찢어놓는 방식으로.


첫 번째 첫 편지.
그때의 동이는 “아가씨”라고 부르기엔 어른 문턱을 막 넘은 상태였고,

“숙녀”라고 부르기엔 아직 삶이 손에 안 잡히던 때였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직후. 세상을 아직 믿어도 된다고 생각하던 얼굴.


첫 번째 운명, 두 아들의 아빠가 건넸던 편지.

그 편지는 사랑이라기보다 약속에 가까웠다.
“함께 살자”라는 문장이 종이 위에 있으면, 삶도 그렇게 되는 줄 알던 시절의 동이.


두 번째 첫 편지.
그때의 동이는 이미 ‘두 아이의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었다.
눈이 사랑보다 먼저 아이들 쪽으로 돌아가던 사람.


두 번째 운명, 별이 아빠가 건넸던 편지.
그 편지는 달랐다.
약속보다 사정이 많았고, 미래보다 오늘이 무거웠다.
그래서 더 절박하게 읽혔다.
“당신이 필요해”라는 말은 때로 사랑이 아니라 생존이기도 하다는 걸, 동이는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지금. 세 번째 첫 편지.
동이는 이제 벌써 할머니였다.
‘할머니’라는 말에는 이상한 온도가 있었다.
따뜻한데, 동시에 한 번 멀어진 느낌. 여자의 자리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난 사람에게 붙는 호칭.


그런데 그 ‘한 발 뒤’의 자리에서, 다시 첫 편지를 받다니.

동이는 봉투를 다시 바라봤다.
이번엔 약속도 아니고, 사정도 아니고, 생존도 아닌 것 같았다.
그냥… 마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
그래서 더 위험했다.


동이는 웃음이 나오려다가, 입술을 다물었다.
웃으면 가벼워질 것 같았고, 울면 무거워질 것 같았다.
그래서 아무 표정도 짓지 않기로 했다.


손님이 잠시 뜸해진 틈.
동이는 카운터 끝으로 손을 뻗었다.
봉투를 들어 올리는 동작이 조심스러웠다.
종이를 아끼는 조심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 조심이었다.


‘세 번째 받는 첫 편지.’


동이는 속으로 그렇게 한번 말해보고는,
마치 그 문장이 입 밖으로 나오면 현실이 확정되어버릴까 봐
다시 조용히 삼켰다.


봉투는 아직 닫혀 있었다.
그 안에 있는 문장들이 그녀의 나이를 어떻게 부를지,
그녀의 마음을 어떤 호칭으로 다시 세울지.


동이는 그걸 알고 싶었고, 동시에 모르고 싶었다.

이전 06화중년에게도 설레는 첫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