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인은 연구소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고위급 연구원 중 한 명이었다. 어둠이 깔린 연구소는 그녀의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실험실 안은 여전히 각종 장비의 미세한 윙윙거리는 소리와 깜빡이는 모니터의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익숙했던 이 공간이 몇 번의 소동을 거친 후 이제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시선은 연구실 한쪽에 놓인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모니터 속 코드는 단순한 데이터 흐름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는 치명적인 비밀이 숨어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데이터를 스크롤하며 심장이 뛰는 소리를 느꼈다. 최근 실험 결과와 정부가 연루된 비밀스러운 문서들이 겹쳐지며 하나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AI 연구가 아니라… 이런 거였던 거야?”
정다인은 중얼거리며 화면을 멈추고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이 모든 것이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녀의 연구는 단순히 기술적 진보를 위한 것이었을 뿐, 이런 음모에 연루될 의도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이 모든 것의 중심에 서 있었다.
신경 네트워크 디바이스
정다인은 서랍 속에서 오래된 디바이스 하나를 꺼냈다. 이 장치는 그녀가 이전 연구에서 실험용으로 설계했던 신경 네트워크 디바이스였다. 평소에는 단순히 데이터를 저장하거나 분석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그녀는 이 장치가 정보를 안전하게 전달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치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금속판으로, 표면에 희미한 회로선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디바이스를 손에 쥔 채 잠시 망설였다.
“민준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정다인은 자신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준은 연구소에서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 데이터를 분석하고 진실을 밝혀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민준의 연구실 잠입
연구소는 이미 깊은 밤의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복도에 반사된 희미한 조명은 정다인의 발소리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민준의 연구실로 향했다. 복도 끝에 위치한 그의 연구실 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정다인은 깊은숨을 내쉬며 문을 열었다. 민준의 작업 공간은 다른 연구실과는 달랐다. 다양한 장비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그의 손길이 느껴지는 책들과 데이터들이 책상에 정돈되어 있었다. 그녀는 작업 터미널 앞에 앉아 장치를 연결했다.
디바이스가 연결되자, 민준의 데이터 터미널이 깜빡이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정다인은 작업을 서두르며 데이터를 업로드했다. 화면에 떠오르는 코드와 함께 그녀는 메시지를 삽입했다.
“의도를 파악하라.”
그녀는 메시지를 남기며 민준이 알아볼 수 있는 단서를 조심스럽게 심어두었다. 그가 이 데이터를 통해 진실에 접근하기를 바라며, 정다인은 터미널에서 장치를 분리했다.
박소현과의 대면
작업을 마치고 머리를 깔끔하게 묶고 연구실을 빠져나오려는 순간, 그녀는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는 박소현과 마주쳤다. 박소현은 항상 그렇듯, 차갑고 단호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정 박사님, 이 늦은 시간에 여긴 무슨 일인가요?”
그 목소리는 마치 정다인의 모든 행동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정다인은 침착하려 노력하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냥… 잠이 오지 않아서요. 바람 좀 쐬러 나가려던 참이에요.”
“그렇군요. 하지만 연구소 밖으로 데이터를 가져나가는 건 금지된다는 걸 아시죠?”
박소현의 시선은 정다인의 손을 향하고 있었다. 정다인은 가볍게 손을 올리며 장치가 없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철저하게 준비했지만, 박소현의 의심스러운 태도는 그녀를 더욱 긴장시켰다.
“물론이죠. 규칙을 어길 생각은 없습니다.”
박소현은 잠시 정다인을 응시하더니 천천히 길을 비켜주었다. 정다인은 떨리는 손을 주먹 쥐며 연구소를 빠져나왔다.
정다인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신이 방금 저지른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달았다. 그녀는 민준이 데이터를 분석하고 진실을 밝혀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눈에는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반면, 연구소 내부에서는 박소현이 자신의 팀에게 명령을 내리며 정다인의 행동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정다인이 뭔가를 숨기고 있음을 알았다.
“정다인…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반드시 알아낼 거야.”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연구소 안의 모든 시계가 같은 순간에 멈춰버렸다. 디지털 화면 속에 알 수 없는 코드가 떠오르며 시스템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AI의 자율 행동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