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이후, 우리 사이엔 확실히 무언가가 달라졌다. 나는 여전히 “누나”라고 불렀고, 그녀는 특별한 호칭은 쓰지 않았지만 말끝마다 애정이 묻어났다.
말투는 부드럽고 천천히, 때로는 장난처럼, 때로는 속삭이듯.
그녀는 자주 내 뒤로 다가와 팔을 감싸며 말했다.
“이런 시간, 너무 오랜만이야… 너 있어서 다행이야.”
그럴 때면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대답했다.
“누나가 있어서 나도… 그래.”
어느 비 오는 아침, 나는 누나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누나… 나 요즘 수업하면서 조금 힘들어.”
그녀는 내 옆에 앉아, 따뜻한 커피잔을 건네며 말했다.
“무슨 일인데?”
“학생 중에 한 명이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 수업할 때 집중도 안 하고… 자기 순서 지나면 딴 짓만 해.”
그녀는 한숨과 함께,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담담히 말했다.
“중국인은 남 일에 별로 관심이 없어. 예를 들어, 가족이 아파도 회사 동료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해. 위로의 말조차 안 하는 경우도 많아. 그건 습관 같은 거야.”
나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웃으며 내 옆구리를 콕 찔렀다.
“그리고 너는 너무 민감해. 여긴 한국이 아니잖아. 조금만 더 마음을 편하게 가져봐.”
나는 몸을 움찔하며 물었다.
“왜 찔러, 누나.”
“그러니까 웃으라고. 너 요즘 너무 표정이 어두워.”
그녀는 내 무릎 위로 손을 얹고, 고개를 내 어깨에 기댔다.
“나랑 있을 땐… 그런 걱정들 다 내려놔도 돼. 너는 지금 여기에 있는 나한테만 집중하면 돼.”
나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말이, 그녀의 체온이, 내가 들어야 했던 가장 따뜻한 위로처럼 마음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날 밤, 우리는 서로의 체온에 깊이 잠겼다. 말없이 눈빛만으로 이어졌던 그 긴 순간은, 단지 욕망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로가 너무 오래 비워둔 마음의 틈을 알아챈 듯, 그녀는 내 품에서 숨을 고르며 조용히 말했다.
“가끔은… 그냥 아무 말 없이 누가 나를 꼭 안아줬으면 했어.”
나는 그녀의 이마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이젠, 그렇게 해줄게. 누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이 웃었다. 그러고는 등을 돌려 내 품에 등을 기대고 누웠다. 나는 습관처럼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고, 손끝으로 느껴지는 그녀의 숨결은 따뜻하고도 잔잔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품은 채, 빗소리에 섞여 천천히 잠에 들었다.
아침은 유난히 조용했다. 커튼 사이로 스며든 햇살은 창문에 맺힌 김을 걷어내듯 방 안을 부드럽게 밝혔고, 나는 그녀의 머리칼 너머로 그 빛을 느꼈다. 내 품 안에서 아직 잠든 그녀를 살며시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부엌에 들어서니, 여전히 낯선 공간이었지만 어제보다는 훨씬 익숙하게 느껴졌다. 냉장고를 열고 계란과 우유를 꺼내려는데, 어느새 문틈으로 그녀가 조용히 나와 식탁에 앉아 있었다. 수면 티셔츠에 헝클어진 머리, 그리고 반쯤 감긴 눈. 그런 모습마저도 사랑스러웠다.
“몰래 뭐 하려다 걸렸네?” 그녀가 눈을 비비며 물었다.
“아침 준비 좀 하려구요. 누나 깨우긴 미안해서.”
그녀는 빙긋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럼 나도 도와줄게. 계란은 내가 풀게.”
우리는 나란히 서서 팬을 달구고, 계란을 저으며 간단한 아침을 준비했다. 그 사이사이, 그녀는 내 옆구리를 툭툭 치며 웃기도 하고, 나는 그녀의 이마에 밀가루를 살짝 묻히기도 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고, 따뜻하게 이어졌다.
갑자기 계란을 풀다 말고 그녀가 하품하며 내 어깨에 턱을 기댔다
“어제 이야기 있잖아. 그 학생 말야. 아직도 마음에 남았어?” 그녀가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제는… 그냥 흘려보내려고요. 누나 말 듣고 나니까 괜히 그 사람에게만 집중했더라구요.”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잘했어. 중요한 건, 너를 아끼는 사람이 누구냐는 거야.”
그 말에 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부엌 조명 아래, 그녀의 눈동자는 환하고, 따뜻했다. 우리는 말없이 마주보다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작은 식탁 위에 두 사람분의 식사가 놓이고, 나란히 앉아 먹기 시작한 그 아침.
그녀는 숟가락을 들며 말했다. “이렇게 매일 아침을 같이 시작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겠다.”
나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등 위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누나가 그렇게만 말해준다면, 난 매일 일찍 일어날 수 있어요.”
그녀는 또 한 번 웃으며, 조용히 말했다. “말도 참 잘해…”
그날 아침, 우리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작게 맺힌 믿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