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틈 너머의 상처: 그녀가 숨기고 있던 이야기

by leolee

연말이 다가오던 어느 저녁,

부엌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내 귀에 낯선 알림음이 들려왔다. 무심코 바라본 그녀의 휴대폰 화면에는 중국어로 된 화상 통화 수신 알림이 떠 있었다. 나는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그 순간 우려 누나는 부엌으로 달려와 급히 전화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처음이었다. 그녀가 어떤 연락에 그렇게 반응하는 모습을 본 건.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느렸고, 어딘가 떨리는 듯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흘러나오는 흐느낌. 나는 호기심과 걱정이 뒤섞인 채 몰래 방 앞에 다가갔고, 문틈 너머로 보인 건 어린 여자아이와의 화상통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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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 누가 괴롭히거나 그런 건 없어?”

“응, 잘 지내. 걱정하지 마… 엄마.”


엄마’라는 말에 내 발끝이 얼어붙는 듯했다. 귀를 의심했지만 분명했다. 그녀는 아이의 엄마였다.


한참을 그대로 서 있다가, 나는 조용히 거실 소파로 돌아와 얼굴을 묻었다. 무언가 툭 끊어진 기분이었다. 그녀가 전화를 마치고 나왔을 때, 나는 묵직한 마음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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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그럼, 그 아이가 누나 딸이야?”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실망했지?”


나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니… 왜 그런 걸 숨겼어?”


“니가 싫어할까 봐.”

그녀의 눈가에는 맺히는 눈물이 보였다.


나는 깊은 숨을 들이쉰 후, 담담히 말했다.

“누나를 선택한 건 조건 때문이 아니야. 나는 그냥 누나가 좋아. 누나가 아끼는 모든 걸… 나도 아끼고 싶어.”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나지막이 말했다.

“…아이 아빠는 흑사회 사람이야.”


보통 사람이었다면 놀라 도망쳤을지도 모를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는 말도 통하지 않던 중국에서 6년 넘게 살아남으며 세상의 이면을 견뎌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말이 나를 위협하기보단, 그녀가 살아온 고단한 시간에 마음이 쓰였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누나… 힘들었겠다. 괜찮아. 이리 와.”


그 말에 그녀는 무너진 듯, 숨죽인 울음을 터트렸다.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너무… 보고 싶어도 보여줄 수가 없어.”


나는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 울어. 누나 다 털어놔. 나 여기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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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 우리는 말과 술을 조금 곁들인 긴 이야기를 나눴다. 흑사회와의 결혼, 이혼, 그녀의 신체에 대한 비밀까지—그동안 아무에게도 꺼내지 못한 이야기들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고요한 방 안, 우리는 서로를 안은 채, 더는 묻지 않고, 더 깊이 이해하며 새벽을 맞이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창밖에서는 밤새 내리던 비가 그친 듯했지만, 짙게 깔린 구름 사이로 햇살이 간신히 커튼 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그녀보다 먼저 눈을 떴다. 여전히 내 품 안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붉게 물든 눈가와 말간 피부, 이마에 엉켜있는 잔머리마저도 유난히 연약해 보였다.


‘이 사람이 나에게, 그리고 나만에게 기대고 있다는 것.’

그 생각이 들자, 가슴 한편이 아리듯 따뜻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고, 그녀를 깨우지 않으려 무릎으로 조심조심 바닥을 딛고 부엌으로 향했다. 전날처럼 계란과 우유를 꺼내어 간단한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글지글 기름에 부쳐지는 소리와 함께, 식탁 위로 갓 구운 빵의 냄새가 퍼져나갔다.


“음… 오늘은 내가 깨워야 했는데.”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거실 쪽에서 말을 건넸다. 수면 티셔츠에 머리는 여전히 헝클어져 있었지만, 그 눈빛은 어딘가 편안해 보였다.


“누나 오늘은 쉬어. 내가 다 할게.”


“괜찮아. 같이 하자. 이제는… 나도 누군가와 함께라는 게 좋거든.”


우리는 어제와 똑같이 나란히 부엌에 섰다. 그녀는 계란을 풀며 중간중간 나를 슬쩍 쳐다보았고, 나는 빵을 굽다 말고 그녀의 머리를 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식탁에 둘이 마주 앉았을 때, 그녀는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조용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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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어젯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누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건 나야. 어제 누나가 진짜 용기 낸 거잖아.”


그녀는 말없이 내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오래된 흉터처럼 그녀의 마음속에 남은 아픔을, 나는 이제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 함께 품기로 했다.


“누나, 이제부터는 혼자 울지 말아요. 나 여기 있잖아요.”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그날 아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조용하고, 소란스럽지 않았지만, 서로를 향한 작은 다짐들이 그 공간 안에 가득 배어 있었다.


그리고 그 다짐은, 오늘도 우리가 함께라는 사실을 조금 더 선명하게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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