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 우리는 함께 마트에 갔다. 주말답게 사람들이 많았지만, 오랜만에 나선 외출이었고, 누나도 오늘은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둘이 웃으며 장을 보던 중, 유제품 코너에서 누나가 갑자기 굳었다.
“…어?”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길이 멈춘 곳에는 단정한 차림의 중년 남자가 있었다. 그는 누나를 보더니 곧장 다가왔다.
“오랜만이네요, 변호사님. 아직 칭다오에 계셨군요?”
그는 누나를 ‘변호사님’이라고 부르며 말을 걸었고, 누나는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직요. 잘 지내시죠?”
두 사람은 중국어로 짧게 말을 주고받았다. 그 대화는 딱딱하고 예의 바르지만, 묘하게 날카로운 긴장이 서려 있었다. 나는 옆에 있었지만, 대화에 끼어들 수도 없었고, 분위기를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가 인사만 남기고 떠난 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나, 아는 사람이야?”
“응… 전에 같이 일했던 검사.”
그녀는 짧게 대답하고는 유제품 코너를 지나쳤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이전과는 달랐다. 입꼬리는 내려가 있었고, 걸음은 살짝 빨라져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그냥 좀… 예전 생각나서.”
그녀는 평소처럼 웃어 보였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뭔가 그 남자와의 대화에서 그녀가 스스로를 단단히 묶어둔 느낌이었다. 마치 다시 ‘변호사 우려’라는 껍질 안으로 들어간 것처럼.
나는 그저 그 옆을 걸으며, 속으로 말도 안 되는 혼란을 삼켰다.
왜 나는 아무 말도 못 했을까. 왜 나는 그 순간 그녀의 보호막도, 편안한 존재도 될 수 없었을까.
중국어가 안 되는 탓인가, 아니면… 그게 원래 직업의 세계라는 건가?
누나는 강한 사람이었다. 늘 똑 부러지고, 논리적으로 말하고,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 강함의 이면에 있는 고단함을, 나는 늘 너무 늦게야 눈치채곤 했다.
그날 밤, 쇼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누나는 조용히 운전을 하며 말했다.
“나, 당신이 옆에 있어서 다행이야.”
그 말이 고맙기도 했지만, 어딘가 더 아프게 다가왔다.
그녀가 진짜로 필요한 순간에 내가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단 생각 때문이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현관에 신발을 벗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나는 따라 들어오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평소 같으면 장을 정리하며 농담을 주고받았겠지만, 오늘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부엌에 장본 것들을 하나씩 꺼내 정리했다.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나… 오늘, 좀 이상했지? 그 사람 때문에?”
그녀는 대답 대신, 잠시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냥… 예전 생각이 좀 나서 그래. 그 사람, 내 사건 중 하나에서 같은 편이었어. 그런데 그땐 아무도 내 편이 아니었거든.”
나는 테이블 끝에 기대앉아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그때도, 내 말은 듣지 않고, 분위기만, 자리만, 체면만 따졌어. 난 사실 그 사람들 앞에 서 있을 때마다… 되게 작아지는 느낌이었어.”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부드러웠다. 힘을 빼고 속마음을 꺼낼 땐 언제나 그런 톤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근데도 계속 그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응.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누군가는, 그런 말도 안 되는 틀을 바꿔야 하잖아.”
나는 그녀의 옆에 서서 조용히 물었다.
“누나한테 힘 되는 사람이… 지금은 있어?”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작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응. 지금은… 너 있어.”
나는 말없이 그녀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잠시 고개를 기대었다. 그녀는 놀라진 않았고, 되려 아주 조심스럽게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고마워. 너랑 있으면… 나도 그냥, 나로 있어도 되는 것 같아.”
조금 후,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커튼 너머로 저녁 햇살이 조금씩 기울어가고 있었고, 그 안에서 우리는 그저 서로의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오늘은 피곤하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이렇게만 있고 싶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필요 없었다. 이대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