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각에서 리란과 마주친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그날의 짧은 인사와 봄바람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갔지만, 이상하리만큼 하루에 한 번쯤은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화면에 새로운 알림이 없는 걸 알면서도, 습관처럼 엄지손가락이 스크롤을 내려 버튼을 눌렀다 놓았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고, 세 번째 저녁,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커피 마실래?”
짧은 문장, 그러나 어딘가 따뜻했다.
난 “좋아.”라고 답했다. 문장을 한 번 지웠다가, 같은 문장으로 다시 쓰고, 마지막에 마침표를 붙이지 않았다. 마침표는 때로 대화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그녀는 장소와 시간을 덧붙였다.
“태평각 언덕 카페, 그 자리. 7시 반.”
말이 한 번 닿으면, 마음도 그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퇴근 후 교무실의 불을 끄고 학교를 나왔다. 노을이 유리창마다 얼핏 얼핏 남아 있었고, 복도 끝에서 늦게까지 남아 있던 아이 둘이 속닥거리며 뛰어 나갔다. 낮의 소음이 빠져나간 뒤에 남는 적막에는 묘한 온기가 있다. 그 온기를 어깨에 걸치고 버스에 올랐다. 창문은 반쯤 내려와 있었고, 바람이 타이어 냄새와 섞여 들어왔다. 바람을 들이마시며 마음속 단어들을 차례로 정리했다. 합격, 보류, 첨삭, 면접, 추천서…
그리고 리란.
마지막 단어에서 호흡이 아주 조금 길어졌다.
언덕 아래 정류장에서 내려 골목을 돌아올라 가면, 유리창이 작은 카페가 있다.
우리가 예전부터 종종 앉던 곳. 메뉴판의 얼룩과 삐걱이는 의자, 유리창 틈으로 스며드는 해풍, 스테인리스 스푼이 컵 가장자리에 부딪힐 때 나는 낮은 소리까지, 나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문을 밀자, 문 위의 작은 종이 가볍게 울렸다. 카운터의 직원이 인사를 했고, 나는 자동으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우리는 늘 따뜻한 걸 마셨다. 늦은 저녁에 차갑게 마시면 밤이 길어진다.
먼저 도착한 나는 자리에서 바다를 내다보았다. 방파제 등불이 켜지고 있었다. 등불은 사람의 감정과 닮아서, 멀리서 보면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보면 사이사이에 어둠이 있다. 그 어둠이 마음을 쉬게 한다. 나는 그 어둠을 조금 더 들이마시고 싶은 기분이었다.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왔다. 코트를 한 팔에 걸친 채,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아주 가벼운 미소. 그 미소는 사과도, 환영도, 망설임도 아닌— 그냥 온다 는 의지의 표시처럼 보였다. 그녀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우리가 사용하던 간단한 인사들이 오갔다.
“왔어.” “응.” “길 막혔어?” “아니.”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 몇 마디 사이에 이미 많은 말이 들어 있었다.
컵이 테이블에 내려앉고, 거품 위로 작은 동그라미가 태어났다 사라졌다. 나는 손을 감싸 쥐며 물었다.
“그날, 태평각에서… 고마웠어. 먼저 멈춰줘서.”
“나도.”
그녀가 짧게 말했다.
“너무 아무 말도 못 하고 지나가면, 오래 남을 것 같았어.”
“남았지.” 내가 웃었다. “그래서 오늘 나왔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우리는 서로의 일상을 교환했다. 그녀는 상가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새로 들어온 점포의 간판이 허가 규정에 걸려 글자 두 개를 바꿔야 한다는 것, 상가 계약금이 전보다 올랐다는 것, 아이 담임 선생님이 바뀌면서 준비물이 복잡해졌다는 것. 나는 교장에서 부탁한 자기소개서 첨삭과 학업계획서 번역 이야기, 말하기 평가 기준을 다시 만들자는 논의가 있었던 일, 보류 학생들의 개별 피드백 계획을 말해주었다.
그녀가 조용히 웃었다.
“결국, 너도 나도, 누군가의 단어를 다듬고 있네.”
“그러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우리는 서로 다듬는 직업인가 봐.”
“그럼 우리도 다듬을까?”
그녀가 말을 던졌다. 그 말은 농담조였지만, 눈빛은 진지했다.
나는 잠깐 숨을 고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도.”
대화는 거칠지 않게, 그러나 바닥까지는 닿는 방향으로 흘렀다. 우리는 전 대화에서의 마지막 대목 말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문장과 그날의 차가운 공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말했다.
“난 내 실패를 아이 곁으로 다시 불러들이고 싶지 않았어. 상가의 말들이 집으로 들어오는 걸 두려워했고. 그게 너를 숨기는 말이 된 거였지.”
나는 대답했다.
“난 기다림보다 확인을 더 원했어. 확인이 서둘러져서 칼이 됐고.”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