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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해”가 커진 순간

by leolee

상황

목요일 저녁 7시 40분, 가을비가 막 그친 합정의 커피숍 ‘라이트빈’.

창가에는 물방울이 매달려 있고, 하우스플렌트 사이로 전등빛이 반짝인다.

매장은 70%쯤 차 있고, 에스프레소 그라인더 소리가 파도처럼 간헐적으로 깨어난다.

그때, 가운데 테이블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커진다.




김소은(27, 여사친 — 고백의 주인공)


처음부터 이렇게 크고 선명한 목소리를 내려고 한 건 아니었다. 단지, 오늘은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하루 종일 내 목 안쪽을 긁었고, 방금 전에 그가 무심하게 “너 요즘 좀 피곤해 보인다”라고 말하는 걸 듣자마자 말은 계획보다 먼저 나왔다. 말은 튀어나오고, 나는 순식간에 그 말의 소유자가 됐다.


“나 너 좋아해. 친구 말고.”


나는 의자를 살짝 당기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컵받침 끝에 손가락을 놓고, 내 손의 떨림을 보이지 않으려고 손톱과 손톱을 맞댔다. 커피잔 위로 올라오는 증기가 내 얼굴을 향해 부드럽게 올라왔다 내려간다. 그 사이, 주변의 시선이 핀 조명처럼 나를 향해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부끄러움은 온몸을 한 번 훑었지만, 후회는 따라오지 않았다. 말은 이미 내 입을 떠났고, 나는 그 말과 함께 걷기로 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던 1~2초가 길게 늘어졌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여러 결말의 미리 보기를 켰다 껐다 했다. 거절—우리는 괜찮을까? 수락—우리는 망가지지 않을까? 천천히—내가 버틸 수 있을까? 나는 흰 셔츠 단추를 한 번 만졌다. 내가 나를 정하는 방법이 꼭 완벽할 필요는 없다고, 그래도 오늘만은 내 말이 내 편이어야 한다고, 마음속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열리려는 찰나, 나도 덧붙였다.


“대답 급하지 않아도 돼. 근데, 오늘은 네가 내 말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


그 순간, 내가 진짜로 바랐던 건 거대한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우리 둘의 온도를 지키는 작고 정확한 문장 한 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주변에서 누군가가 기침을 한 번 했고, 바리스타가 우유피처를 두 번 탁탁 쳤다. 그와 내가 동시에 숨을 들이마셨다. 내 심장은 도망치고 싶어 했고, 내 눈은 머물고 싶어 했다. 나는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내가 고른 단어를 믿어보기로.


오늘의 내 해석: 고백은 정답을 묻는 시험이 아니라, 내가 쓴 문장을 내가 책임지는 첫 순간이다.




이재훈(28, 남사친 — 대답의 주인공)


말이 커졌다. 아니, 그녀의 말이 커진 게 아니라 내 주변의 소음이 작아져서 그 말만 크게 들렸다.


“나 너 좋아해. 친구 말고.”


눈동자에 커피숍의 전등이 두 개쯤 박혀 반짝였고, 그녀의 잔은 내 잔보다 반 컵 더 비어 있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숟가락을 돌리려다 멈췄다. 무의미한 움직임이 대답 같아 보이는 게 싫었다. 내가 느리게 숨을 들이마시고, 떠오르는 모든 대답 후보를 차례로 거절했다. ‘우리 친구로 지내자’는 내 표정에서조차 비겁해 보였고, ‘나도 좋아’는 너무 쉽게 들릴까 봐 겁났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그녀의 연락 알림음에 반사적으로 웃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지키던 선, 서로의 생활 리듬, 다정에 기대어도 무너지지 않던 균형을 잃을까 봐 조용히 접어둔 감정들이 있었다. 오늘, 그 감정들은 의자 밑에서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나는 컵받침을 집어 잔의 물기를 닦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주변의 시선이 내 뺨을 스쳐 지나갔지만, 나와 그녀 사이의 거리는 뜻밖에 정적이었다.


“나도 좋아했어. 다만, 우리가 친구였던 시간이 귀해서 겁이 났어. 좋은 걸 망가뜨리는 사람이 되기 싫어서.”


말이 입 밖으로 나온 뒤에야, 그 문장이 내 안에서 얼마나 오래 준비되어 있었는지 알았다. 나는 이어서 말했다. “오늘 여기서 ‘연애 시작’이라고 이름 붙이기보다는, 우리 둘의 속도를 같이 정해보자. 내일 아침 커피를 또 같이 마시고, 이번 주말엔 네가 가고 싶다던 전시 가고, 다음 주에는… 그러다 자연스럽게 불러볼래. 여자친구라고.”

그녀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고, 입술이 아주 천천히 위로 당겨졌다. 나는 주변 소란이 다시 켜지는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가 ‘아’ 하고 짧게 숨을 뱉었고, 바리스타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내 마음에 작은 서명을 남겼다. “그리고… 고마워. 오늘 큰 목소리로 내 마음까지 불러줘서.”


오늘의 내 해석: 대답은 선택지가 아니라 속도를 약속하는 일이다—우리는 같은 발걸음을 고른다.




박주하(22, 바리스타 — 포터필터를 쥔 손)


스팀완드를 닦던 손이 멈췄다. “나 너 좋아해. 친구 말고.” 소리가 깔끔하게 컵들 사이로 들어왔다. 카페는 이런 장면을 종종 품는다. 고백, 이별, 제안, 합격 통보, 울음, 웃음. 그런데 방금의 고백은 볼륨만 커진 게 아니라, 어휘가 명확했다. ‘친구 말고’—그 말은 눅눅한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우유피처를 두 번 가볍게 쳐서 거품을 정리했다. 손에 들린 금속의 온도가 안정되면 내 마음도 덩달아 차분해진다.

사장님은 음악 볼륨을 미세하게 내렸다. 매장 전체가 숨을 들이마신 것처럼 조용해졌다. 나는 컵 가장자리를 마른행주로 훑으며 그들의 표정을 훔쳐보았다. 소녀 같은 얼굴을 한 여자의 눈은 결심으로 단단했고, 남자의 입술은 오래된 문장을 조심히 펼치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그 순간, 우리가 판매하는 건 커피가 아니라, 누군가가 자기 문장을 똑바로 말할 수 있는 속도와 온도라는 걸 다시 생각했다.

남자가 말했다. “나도 좋아했어. 다만… 속도를 같이 정하자.” 그 말이 떨어지자 나는 바닐라빈 시럽을 따르던 동작에서 자연히 힘을 뺐다. 누군가는 지금, 쉽게 ‘키스하라’고 속삭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이들이 키스 대신 일정을 약속한 것이 더 아름다웠다. 내일의 커피, 주말의 전시, 그다음의 호칭. 삶은 언제나 다음 장을 열어젖히는 작은 경첩들 위에서 돌아간다.

그녀가 웃고, 주변 테이블에서 숨겨진 미소들이 퍼졌다. 나는 컵 받침에 “굿 럭”이라고 작은 웃는 얼굴을 그려 넣었다. 주문객의 이름을 불러 드리며, 내 마음속에서도 조용히 박수를 쳤다. 오늘의 매장은 한 잔의 라떼와 한 줄의 용기로 따뜻해졌다.


오늘의 내 해석: 카페는 커피를 파는 곳 같지만, 사실은 사람이 자기 말의 온도를 맞추는 장소다.



오미정(45, 점장 — 볼륨 노브를 돌리며)


볼륨을 3에서 2.5로 내렸다. 너무 크게 내리면 관음처럼 보일 수 있고, 그대로 두면 말의 품격을 해친다. 가게를 오래 운영하다 보면 감정의 기압계를 눈빛과 자세만으로 읽게 된다. 방금 그 고백은 급작스럽지만 진지했고, 남자는 도망치지 않는 눈을 하고 있었다. 나는 바의 모서리에 기대어 컵라벨을 정리하는 척, 그들의 대화의 리듬을 지켜보았다.

이 공간은 하루에도 수십 번 여러 사람의 사생활이 스쳐 지나간다. 우리는 과열을 식히기 위해, 때로는 조명을 한 단계 낮추고, 때로는 창문을 조금 열어 공기를 바꾼다. 오늘은 빛도 공기도 좋았다. 그래서 내가 할 일은 존중의 울타리를 치는 것뿐. 아이가 뛰면 러그를 고쳐 깔고, 노트북 소리가 커지면 콘센트 좌석 안내를 하고, 누군가 큰 목소리로 울면 휴지를 건넨다. 지금은 그 모든 것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숙련이 필요했다.

남자의 대답이 나왔다.


“나도 좋아했어. 다만 천천히.”


그 말은 이 공간의 시간과도 잘 맞았다. ‘천천히’라는 단어는 매장에서 가장 비싼 음료와 같다. 손님들이 앉아 있는 이유는 서둘러 배달되는 행복이 아니라, 기다릴 수 있는 기쁨 때문이다. 그들의 미소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카운터 밑에서 미리 접어둔 작은 빈 카드에 ‘해피 뉴 페이지’라고 적어 놓았다. 혹시 그들이 계산할 때 눈에 띄면, 고개를 끄덕이며 카드를 내밀고 싶었다.

누군가는 ‘여기서 고백을 하다니 무례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우리는 공공의 공간에서 서로의 사적 순간을 조심히 공유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오늘은 보기 드물게 괜찮은 수업이었다.


오늘의 내 해석: 좋은 매장 운영의 비밀은 판매가 아니라 공공 예절의 디테일에 있다—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가 최고의 서비스다.




정다온(20, 창가 자리 — 토익교재 위의 귓속말)


LC 파트3를 풀다가, 스피커의 목소리가 현실로 넘어왔다. “나 너 좋아해. 친구 말고.” 교재의 빈칸 채우기가 갑자기 의미 없어 보여서 형광펜을 내려놓았다. 나는 사랑에 대해 많이 읽었지만, 누군가가 이렇게 한 문장으로 상황을 바꾸는 건 처음 봤다. 손이 먼저 반응해서 물병 뚜껑을 닫고, 스티커가 붙은 노트를 덮었다. 시험 날짜는 다가오고, 점수는 변덕스럽다. 하지만 방금의 장면은 정확했다.

나는 여자의 용기를 부러워했다. 사실 나도 몇 주째 같은 지하철 칸에서 같은 시간에 내리는 남자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가며,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 마음이 가고 있었다. 고백은 고난도의 회화 같아서, 입을 떼면 틀릴까 봐 쉬운 단어만 반복한다. ‘오늘 날씨 좋죠?’ ‘커피 좋아하세요?’ 그런데 방금 그녀는 입을 떼고, 틀리지 않았다. 틀린다 해도, 그것은 오답이 아니라 자기 언어일 것이다.

남자의 대답이 들렸다. “나도 좋아했어. 우리 속도를 같이 정하자.” 그 말을 노트 가장자리 빈칸에 옮겨 적었다. ‘속도를 같이 정하자’—왜 나는 시험의 점수만 정하고, 나의 삶의 속도는 남이 정하게 두었을까. 오늘은 30문제 대신 한 문장을 외우기로 했다. 단어장을 덮고, 나는 조용히 웃었다. 언젠가 내가 고백할 때는, 그 문장처럼 말하자. “우리 속도를 같이 정하자.” 그 말 속에는 나와 상대가 같은 문장의 주어로 서는 배려가 있다.

현실로 돌아와 페이지를 넘겼다. 듣기 지문 속 남녀가 ‘잘 들리지 않네요’라고 말할 때, 나는 속으로 ‘그래도 말해봐요’라고 중얼거렸다.


오늘의 내 해석: 사랑의 유창함은 말의 화려함이 아니라, 속도를 함께 고르는 문장에서 시작된다.




서민규(34, 프리랜서 개발자 — 노트북 화면 뒤의 침묵)


버그 리포트가 열려 있고, 커서가 깜박인다. 나는 방금까지 API 응답 시간을 줄이는 법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옆 테이블에서 더 중요한 ‘응답 시간’이 시작됐다. 고백—대답—침묵—합의. 마치 요청과 응답, 타임아웃과 리트라이처럼 들렸다. 여자의 요청은 명시적이었고, 남자의 응답은 200 OK였다. 단, 페이로드에 ‘속도를 합의합시다’라는 파라미터가 붙었다.

내가 가장 흥미롭게 본 건 장애 대응 방식이다. 고백의 볼륨이 평소보다 커졌을 때, 매장은 과도한 개입을 하지 않았다. 관찰 가능한 것들: 점장의 볼륨 조정, 바리스타의 손동작 안정화, 손님들의 시선 제어. 전체 시스템이 과열되지 않도록 작은 스로틀링이 걸렸다. 그 사이 남자는 말을 고르고, 여자는 숨을 정리했다.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세션이 열렸다.

나는 노트북을 덮었다. ‘속도를 같이 정하자’는 문장이 오늘의 커밋 메시지 같았다. 프로젝트에도 적용하고 싶다. 빠른 출시보다 중요한 건 팀의 마음이 같은 속도로 걷는가. 나는 슬랙에 ‘배포 지연—사유: 품질과 보폭 맞춤’이라고 적었다 지웠다. 약간의 비웃음을 살지도 모르지만, 결국 우리가 만드는 것도 사람이 쓰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아주 작은 소리로 웃는 걸 보며, 나는 다시 터미널을 열었다. 인생의 네트워크는 기껏해야 이만큼의 대역폭에서 흘러간다. 중요할 때는 대역폭을 덜 쓰고, 문장을 더 아낀다.


오늘의 내 해석: 시스템이 건강할 때의 신호는 속도가 아니라 안정적인 왕복이다—사람 사이도 마찬가지.




장연서(26) & 조민수(26, 커플 — 맞은편 테이블)


우리는 디저트를 나누어 먹다가, 자연스럽게 둘의 대화가 멈췄다. 연서는 포크를 들고 허공에서 멈춰 있었고, 민수는 생크림을 손가락으로 훔쳐 먹으려다 멈췄다. “나 너 좋아해. 친구 말고.” 연서는 순간, 3년 전의 우리를 떠올렸다. 민수에게 먼저 ‘좋아한다’라고 말했던 밤, 강변의 가로등이 눈물처럼 흔들리던 장면. 민수는 지금의 고백이 우리의 편지지를 들춰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동시에 그들의 다음 장면을 예측하는 사람들처럼 숨을 죽였다.

남자의 대답이 천천히 나왔을 때, 연서는 고개를 끄덕였고 민수는 ‘잘했다’고 속삭였다. 속도를 정한다는 말에 우리는 서로를 돌아봤다. 우리가 너무 빠를 때 넘어졌고, 너무 느릴 때 흐릿해졌다는 걸 동시에 기억했다. 그래서 요즘은 주말마다 서로의 속도를 묻는다. “이번 주 너는 빨라? 느려?” 그러면 우리는 그에 맞춰 데이트의 리듬을 바꾸었다.

그들의 장면은 우리에게도 조용한 과제를 남겼다. 다음 달 우리가 생각 중인 동거 이야기를 좀 더 침착하게 꺼내야겠다는 것. 오늘처럼 큰 목소리 대신 정확한 문장으로. 우리는 포크를 내려놓고 서로의 손등을 한 번 스쳤다. 달콤한 케이크는 더 달콤해졌고, 가게의 음악은 또렷해졌다.


오늘의 내 해석: 사랑의 지속은 설렘보다 리듬 관리에서 나온다—그들의 ‘천천히’는 가장 빠른 약속이었다.




최민아(35, 유모차 엄마 — 낮은 목소리의 박수)


아이의 낮잠이 막 끝났고, 유모차의 차양막 사이로 반달 같은 눈이 보였다. 아이가 뒤척이는 순간, 여자의 말이 컵처럼 내 귀에 딱 들어왔다. “나 너 좋아해. 친구 말고.” 나는 본능적으로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소음을 줄이려 했다. 그렇지만 곧 알았다. 오늘의 ‘소음’은 소음이 아니라 한 사람의 필요한 볼륨이라는 걸. 고백은 속삭임으로는 안 될 때가 있다.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부터 가장 자주 떠올리는 문장은 ‘정확한 소리의 크기’다. 아이에게 위험을 알려줄 때는 크게, 사랑을 말할 때는 가깝게, 사과할 때는 낮게. 방금의 고백은 사랑이었지만, 필요해서 크게였다. 주변의 시선이 그 볼륨을 정당화해 주는 풍경을 처음 보았다. 아무도 싫은 표정을 짓지 않았다. 다들 아주 조금씩, 자리를 내주었다. 그녀가 혼자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의 보호막이 생겼다.

남자의 대답이 온순했고, 정확했다. “우리 속도를 같이 정하자.” 나는 유모차를 살짝 뒤로 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하품을 했고, 나는 아이에게 속삭였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해. '같이'라고.” 아이가 무슨 말인지 모를 나이지만, 오늘의 장면은 내 아이의 언어를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 것 같았다.


오늘의 내 해석: 좋은 사회는 누군가의 필요한 볼륨을 잠깐 허락해 주는 여백에서 시작한다.




권태섭(30, 배달 라이더 — 문 앞 잠깐의 정지)


픽업 알림을 확인하고 문을 열려다, 발걸음이 멈췄다. 단골 카페라서인지 매장의 온도가 눈빛으로 읽혔다. 여자의 고백은 짧고 컸고, 남자의 대답은 길고 낮았다. 나는 문 옆에 서서 헬멧을 팔에 걸고 있었다. 배달은 늘 급한데, 급할수록 멈춰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걸 나는 안다. 비 오는 날 보도블록의 금속 커버 앞, 어린아이가 뛰어드는 횡단보도 앞, 그리고 지금처럼 누군가의 삶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장면 앞.

그의 말이 끝나고, 나는 문을 닫지 않게 살짝 잡아 주었다. 바람이 덜 들어오도록 각도를 조절했다. 누가 보지 않아도, 이런 미세한 제스처는 나를 지켜준다. 동시에, 남과 여가 서로를 지키는 걸 목격하는 건 나에게도 에너지가 된다. 나는 오늘 밤 배달을 더 서두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음식의 온도만큼, 사람의 온도도 보존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주문이 준비됐고, 바리스타가 웃었다. 나는 조용히 엄지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헬멧을 쓰며 중얼거렸다. “둘이, 잘 가요.”


오늘의 내 해석: 급함 속에서도 가치 있는 것은 멈춤의 태도다—사람의 온도를 지키는 쪽에 서자.



문세곤(70, 시인 — 모서리 자리의 기록)


오늘의 커피는 진했다. 한 모금 머금을 때마다 오래된 시구가 설탕처럼 바닥에 남았다. 그때, 한 문장이 공중에서 천천히 접혔다 펼쳐졌다. “나 너 좋아해. 친구 말고.” 사랑은 대체로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느 순간 자기 체적을 가져야 한다. 그녀의 말은 자기 체적을 얻었다.

남자의 대답은 즉흥시 같았다. 운율은 느리고, 의미는 단단했다. “나도 좋아했어… 우리 속도를 같이 정하자.” 낭만은 번개처럼 치고 지나가지만, 사랑은 날씨다. 날씨는 리듬이고, 리듬은 약속이다. 둘이 동시에 웃을 때, 방금 내 안에서 꺼져가던 오래된 등불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 나는 종이에 한 줄 적었다.


-사랑은 종종 완성된 문장으로 오지 않는다. 반쯤 쓰인 문장을 들고 서로의 펜을 빌릴 때 완성된다.-


사람들이 각자의 일로 돌아가기 전, 카페의 공기는 합창처럼 가벼웠다. 이 도시의 밤은 이런 작은 합의들로 천천히 따뜻해진다.


오늘의 내 해석: 사랑은 번개가 아니라 날씨—우리는 오늘 같은 날씨를 오래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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