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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저녁

by leolee

• 목요일 저녁 6시 10분, 미국 동부의 작은 교외 마을. 눈 오기 직전의 차가운 공기, 현관에는 단풍 리스.

• 거실 TV에 풋볼 경기 무음 재생, 부엌에서는 칠면조·스터핑·그레이비·그린빈 캐서롤·크랜베리 소스·펌킨파이가 대기.


• 식탁엔 자리카드와 감사카드, 가운데에는 촛불과 옥수수 이삭. 가족은 감사 한마디를 돌아가며 나누기로 했다.




엘리너(75, 할머니·호스트)


나는 테이블보의 주름을 펴면서 짧게 기도한다. 곡식을 주신 손, 우리를 일하게 하신 손, 서로 붙들게 하신 손. 아이들이 떠들면 나는 미소로 순서를 세운다. “네가 말할 때 우리는 듣는다.” 내게 감사는 감정이 아니라 매일의 습관이고, 신앙은 생활의 리듬이다. 이런 저녁이 바로 시민 덕성을 가르치는 첫 교실이라고 믿는다.


오늘의 내 해석: 축제의 핵심은 음식이 아니라 질서 있는 친절이다—듣고, 나누고, 다시 듣는 훈련.




제임스(77, 할아버지·터키 카버)


나는 칼을 조용히 간다. 뼈마디를 따라 일정한 두께로 썬다. 누구는 다리를, 누구는 가슴살을 원한다—나는 공정하게 나누려 한다. 스토아의 말을 되뇐다. “통제 가능한 것에만 힘을 쓰라.” 마른 부위엔 그레이비를 덧붙고, 말 대신 배려를 얹는다.


오늘의 내 해석: 감사는 연설이 아니라 균등히 썰린 한 접시에서 드러난다.




클레어(45, 큰딸·집주인)


나는 오븐 타이머와 그룹 채팅, 자리배치와 플레이리스트를 머릿속에서 동시에 굴린다. 올해는 ‘보이지 않는 노동’을 계약처럼 나눴다—설거지는 남동생, 서빙은 조카, 쓰레기는 아빠. 페미니즘을 설교로 말하지 않아도, 역할 재배분이 바로 오늘의 진보다. 감사카드에 쓴다. “고마움과 일은 함께 나눌수록 가벼워진다.”


오늘의 내 해석: 가족은 사랑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공정한 업무분담이라는 사회계약이 필요하다.




마테오(47, 사위·이민 15년차)


나는 건배사를 스페인어와 영어로 섞는다. “Por la familia, for this roof we worked for.” 모기지 서명하던 날이 떠오른다. 아메리칸 드림을 부끄럽지 않게 말하고 싶다. 나는 멕시코식 콘에 치즈와 파프리카를 더해 한 접시를 낸다—섞이지 않고 함께 있는 다양성, 샐러드볼.

오늘의 내 해석: 내가 ‘손님 사위’에서 ‘주인’이 된 순간은 국적이 아니라 책임을 나눈 날이었다.




아이샤(29, 사촌·비건)


나는 토퓨 로프를 오븐에서 꺼낸다. 몇몇이 웃어도 괜찮다. 밀의 공리주의가 내 마음을 지탱한다—오늘의 행복 총량을 키우려면 내 접시는 동물 없는 쪽. 누가 “전통은 칠면조지”라고 하면, 나는 “전통도 업데이트돼야 진짜 전통”이라 답한다. 조카에게 말한다. “네가 좋아하는 것부터 먹어. 그게 네 선택.”


오늘의 내 해석: 전통은 고정물이 아니다—고통을 줄이고 기쁨을 늘리는 방향으로 자란다.




노아(17, 조카)


내 순서가 오면 잠깐 멈칫한다. 나는 커밍아웃 1년 차, 여전히 정체성과 소속을 탐색 중이다. “올해 나는 나를 좀 더 좋아하게 돼서 고마워요.” 말을 끝내자 작은 박수가 들린다. 실존주의 수업 문장이 머리를 스친다. 자유는 선택이고, 선택은 책임. 나는 펌킨파이를 정확히 같은 크기로 자른다.


오늘의 내 해석: 가족이 나를 선택하지 않아도, 나는 나를 선택하고 그 선택을 사랑으로 증명한다.




소피아(9, 조카)


나는 감사카드에 칠면조 손바닥과 주황 잎을 그린다. 모두가 같은 크기의 파이를 먹을 때가 제일 좋다. 삼촌 접시가 살짝 크면 나는 눈썹을 올리고 “공평 중요!”라고 말한다. 모두 웃고, 삼촌이 조금 덜어 준다. 나의 정의감은 간단하다—똑같이.


오늘의 내 해석: 행복은 똑같이 나눠진 조각에서 시작한다.



마이크(52, 작은아버지)


그레이비가 묽으면 전분을 한 티스푼 더—나는 프래그머티스트다. 잘 안 되면 고치고, 안 고쳐지면 다른 방법을 찾는다. 칠면조가 마르면 “그럼 샌드위치 2차!”로 분위기를 돌린다. 논쟁이 뜨거워지면 채널 바꾸듯 화제를 바꾼다.


오늘의 내 해석: 완벽한 계획보다 수정 가능한 계획이 낫다—오늘의 ‘맛’도 그렇게 완성된다.




루스(81, 큰이모·가족 기록 보관소)


나는 오래된 레시피카드를 꺼낸다. 피칸파이의 얼룩과 연필 표식. 추수감사절은 우리 집의 작은 시민 종교다—국기, 기도, 가족사진이 한 프레임에 들어오는 의식. 그러나 나는 젊은 세대의 새 의식도 존중한다. 의식은 사람을 위해 있고, 사람은 사랑을 위해 있다.


오늘의 내 해석: 의식은 변해도 기억은 이어진다—우리는 같은 테이블로 시대를 건넌다.




리나(34, 이웃·인도 유학생·초대 손님)


며칠 전 디왈리를 보냈다. 오늘은 다른 빛—초의 따뜻함과 버터 롤 향. 이 집은 멜팅팟이 아니라 샐러드볼 같다. 각자의 맛이 살아 있다. 첫 한 술을 뜨며 느낀다. 소속은 여권이 주지 않는다—자리를 내주는 손이 준다. 돌아갈 때 남은 파이 한 조각을 싸 준다.


오늘의 내 해석: 환대는 시민권 이전의 시민성—자리를 내주는 제스처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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