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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leolee
Dec 16. 2024
마지막 저녁
우루무치의 저녁은 무겁고 차가웠다. 식당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세라의 아버지는 조용히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뒤를 따라오던 세라와 나, 그리고 어머니는 묘한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세라는 나를 힐끗 보며 미소를 지었지만, 나는 그 미소의 의미를 읽기 어려웠다.
식당에 도착하자 따뜻한 실내 공기가 우리를 맞았다. 조명이 은은한 식당은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로 붐볐다. 세라의 아버지는 우리를 안내하며 한쪽에 마련된 둥근 테이블로 자리를 잡았다. 메뉴판을 펼치며 담담하게 말했다.
“먼 길 왔는데 몸은 괜찮
은가
?”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공기가 차가워서 그런지 오히려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입니다.”
세라는 옆에서 메뉴를 살피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 집 양고기 요리가 유명하다고 들었어요. 한 번 시켜볼까
?”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웨이터를 불렀다. “그래, 좋아.”
"아 맞다. 오빠는 양고기 못 먹으니까 다른 거 주문할게"
배려심 깊은 세라의 센스였다.
하지만 주문이 끝난 후의 대화는 차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국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보험 같은 건 잘 준비하나
?” 아버지가 조용히 물었다.
“보험이요?” 나는 순간 당황하며 물었다.
“네, 한국에서는 기본적으로 회사에서 제공하는 보험 외에도 개인적으로 준비하시는 분들이 많죠.”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세라랑 진지하게 교제한다면, 미래에 대한 준비도 철저히 해야 할
텐데
보험이 없으면 나중에 어떻게
하려고 하나
?”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한국에서는 당연히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중국에서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학교에서 제공하는 기본 보험만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장기적인 준비도
고려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기본 보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
하네
. 미래에 대한 계획이 없다면, 세라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하지 않겠
나
?”
그의 말에 세라는 잠시 멈칫하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아빠 말씀이 맞아. 요즘은 미리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나중에 더 힘들잖아.”
나는 세라의 반응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녀는 항상 내 편이었는데, 이 순간에는 나를 지지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조용히 음식을 집으며 대화를 지켜보았다. 따뜻한 미소를 유지했지만, 그 역시 아버지의 의견에 동조하는 듯했다.
“제가 지금까지 많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세라와 함께 미래를 준비하고 싶습니다. 보험도, 다른 것들도 지금부터 바로 시작할 겁니다.”
아버지는 말없이 음식을 입에 넣었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예상치 못한 대화의 전환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세라의 신용카드 빚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내 말에 테이블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세라는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뭐라고?” 그녀가 물었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그랬잖아. 신용카드 빚이 조금 있다고. 부모님도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동시에 세라를 바라봤다. 어머니는 조용히 물었다.
“세라, 이게 무슨 이야기니?”
세라는 얼굴이 빨개지며 말을 더듬었다.
“사실은… 제가 신용카드로 조금 무리한 적이 있어요. 씀씀이를 줄이지 못해서 빚이 좀 생겼어요. 그래서 상하이로 옮겨 더 많은 돈을 벌려고 했던 거고요…”
나는 세라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착잡했다. 그녀가 나에게 보여주었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이런 고민을 숨기기 위한 방패였을까?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사정이 있었다니, 처음 듣는 이야기구나.”
어머니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세라를 바라봤다.
“네가 그렇게 고생하고 있는 줄 몰랐어. 왜 진작 말하지 않았니?”
세라는 고개를 떨구며 작게 말했다.
“저 혼자 해결하려고 했어요…
오빠
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고요.”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식당의 소음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우리 테이블은 고요했다.
마지막 밤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다시 세라의 집으로 돌아왔다. 차 안에서의 분위기는 더 묵직했다.
집으로 들어와 어머니가
준비해 둔 차를 마시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많이 부족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하지만 세라와 함께라면 어떤 것도 바꿀 자신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겠지만, 우리 딸과의 미래를 함께하기엔 준비가 부족해
보인다네
. 그래도 세라와의 관계는
자네
가 알아서 판단하길 바
라네
.”
그날 밤, 나는 세라와 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말에 대해 미안해했지만, 동시에
자신도 나와의 관계를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우루무치에서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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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대관의 여름
02
첫 만남의 어색함
03
우루무치에서의 하루
04
마지막 저녁
05
우루무치에서 칭다오로 - 멈출 수 없는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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