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천지 한 바닥에 뿌리 없는 낭기로다.
한 가지는 달이 열고 한 가지는 해가 열어
달랑 따서 안을 집고 해를 따서 겉을 집어
상별 따서 상침 놓고 중별 따서 중침 놓고
무지개로 선을 둘러 당사실로 귀빱 쳐서
대구 팔사 끈이 질러 서울이라 지나치다가
남대문에 걸어 놓고, 내려가는 구관들아. 올라오는 신관들아
다른 기경 마오시고 줌치 기경 하옵시오.
누구 씨가 지은 주머니, 주머니 값이 얼만고요?
저 방안에 봉금 씨랑 이 방안에 순금 씨랑
둘이 앉아 집은 주머니, 돈이라도 열에 닷 냥
은이라도 열에 닷 냥, 서른 냥이 본값이요.
주머니는 좋건마는 돈이 없어 못 사겠소.
- 경남 거창 지역 민요, <줌치 노래>
이 ’줌치 노래‘, 일명 ’주머니 노래‘ 또는 ’줌치요‘는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여성들이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주머니를 소재로 한 민요이다. 이 ’줌치 노래‘는 4 음보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삼을 삼을 때나 바느질할 때 독창으로 읊조리는 방식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 노래에는 정성을 들여 곱게 지은 주머니를 선비에게 판다는 내용으로 아름다운 주머니를 만들고자 하는 처녀들의 열망이 담겨 있다. 이 민요는 노동요로 볼 수 있으나 실제로는 놀이의 현장에서도 불렸기 때문에, 서정성이 많이 나타나는 유희요(遊戲謠)로도 분류된다. 제도적인 속박과 제한된 공간에서 생활하던 여성이 주머니 속에 해와 달과 별을 수용하고, 또한 무지개를 매개자로 등장시켜 인간과 하늘을 연결하고 있으니, 문학적으로 상상력이 풍부한 노래라고 볼 수 있다. 이 민요에서 줌치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포용의 주머니로서 여인들의 세계관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여인들의 솜씨를 뽐내는 사물이다.
여자들이 한복을 입을 때 노리개 삼아 허리춤에 달고 다니는 것이 주머니다. 한복에는 조끼 말고는 호주머니가 없어 실용적으로도 요긴하게 쓰였다. 그보다는 복을 가져다주고 액을 물리치는 일종의 부적으로 주머니를 차고 다녔다. 돌잔치나 환갑잔치에 복주머니를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던 것도 그런 연유이다. 그랬기 때문에 처녀들은 정성껏 주머니를 만들었으며, 바느질 솜씨와 수놓는 솜씨가 처녀의 됨됨이를 판단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자신의 주머니 채우기에 급급하다’라는 말이 있듯이 오늘날에는 주머니는 탐욕의 상징이 되고 있다.
인류가 원시시대에는 나무 잎사귀나 동물의 가죽으로 몸을 감싸서 추위에 대비했고 수치심을 가렸다고 추정된다. 문명의 발달로 인류는 식물이나 동물에서 얻은 실을 짜서 옷감을 만드는 기술을 개발하였다. 이를 직물(織物)이라 하는데, 날줄과 씨줄로 실을 교차하여 짰다. 직물을 이루는 원재료는 삼, 면화, 누에고치, 양털, 화학섬유 등으로 변천해 왔다. 옛날에는 이 직물을 포(布)라고 불렀는데 화폐로도 쓰였고 세금을 내는 수단으로도 쓰였다. 성경에 세마포(細麻布)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2천여 년 전에는 사람이 죽으면 주위의 사람들이 제비를 뽑아 그 사람이 입던 옷을 가져다가 입었던 것 같다. 직물을 구현하기 위해서 기계가 고안되었는데 이 기계를 통칭하여 직기(織機)라고 한다. 이 직기는 수공업 단계에서 자동화 시대까지 다양하게 발전되어 왔다.
삼베는 아주 오래된 옷감의 재료이다. 삼베는 삼 혹은 마 껍질의 안쪽에 있는 인피섬유(靭皮纖維)에서 뽑은 실로 짠 직물이다. 삼은 일명 대마(大麻)라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환각제 혹은 마약의 재료로 알려져 있다. 우리말로 베 또는 삼베라고 부르고 한자어로는 대마포라고 한다. 지금은 삼베는 주로 수의(壽衣)로 사용된다. 삼베는 수분을 잘 흡수하고 배출하며 자외선 차단능력을 갖추고 있고, 곰팡이를 억제하는 항균성과 항독성이 있어 우리 민족이 애용하던 의복 재료였다. 삼베의 역사는 매우 길어 한민족이 한반도로 이주할 때 가지고 왔다고 짐작되며, 이미 삼국시대에 쓰였다. 마직물(麻織物)은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여름철 옷감으로 애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대마의 인피는 품질이 좋아서 섬세하게 쪼개지므로 극세사를 만들 수 있었고, 여인들의 손길이 섬세해 중국, 일본, 인도 등지보다 더 섬세한 마포를 제직(製織)할 수 있었다.
모시는 모시풀의 인피(靭皮)에서 얻은 섬유로 만든 직물로 저마포 혹은 저포(苧布)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모시풀은 전라북도 정읍(井邑)과 고창(高敞) 지방에서 많이 재배하며 금강(錦江) 일대의 충청남도 청양(靑陽)과 보령(保寧)에서 재배가 성행했다. 그러나 청양이나 보령의 모시는 올이 굵어 실용적인 것으로 이용되고 세(細) 모시는 주로 충청남도 한산(韓山)에서 생산되었다. 한산의 세모시는 예부터 명산(名産)으로 꼽혀왔다. 흰 빛깔의 모시인 백저포는 고려 시대 무역품 가운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모시는 통풍이 잘되어 시원하며, 가볍고 산뜻하여 여름철 옷감으로 쓰였다.
면(綿)은 일찍이 인도에서 수공업 화하여 기원전·후에 페르시아와 그 주변 지역, 동남아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면직물의 기원은 일반적으로 문익점(1329~1398)이 중국의 원나라에서 가져온 목화(木花)씨에 의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고구려나 신라 시대 기록에 이미 면직물이 나온다고 한다. 문익점의 목화씨 반입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면직물을 제직(製織)한 셈인데 재료인 섬유의 출처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나라와 동남아 또는 중국의 남부 지역과 해상 교통이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증거가 많으니 그때 면의 유통이 있었으리라고 짐작된다. 문익점의 장인이 목화 재배에 성공하고 그 뒤 직조기술을 배워 면직물을 짜기 시작한 뒤 10년도 못 되어 이 직물이 전국으로 퍼지게 되었다. 조선 시대부터는 백성 상하가 다 무명옷을 입었다는 실록의 기록도 전한다.
우리나라에서 한 세대 전만 해도 목화의 재배와 수확은 농촌에서 큰일이었다. 삼과 모시풀은 풀로 인식했지만, 목화(木花)는 나무라고 보았던지 나무 목(木) 자를 쓰고 있다. 목화 따는 일과 목화에서 씨를 빼내고 물레를 돌려 실을 자아서 베틀로 옷감을 짜는 일이 여간 고단한 일이 아니었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옷감을 만드는 일은 아낙네들 몫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면직물이 일본으로 수출되는 품목에 들어 있었고, 조선의 면포는 당시 일본에서는 고가의 사치품이었다고 한다. 옛날에 우리나라에 물레방아라고 있었다. 모양이 물레와 유사해서 그렇게 부르지 않았나 싶다. 물레방아는 물이 떨어지는 힘으로 물레바퀴를 돌려 곡식을 찧는 방아로 과학적으로 에너지를 이용한 이기(利器)이기는 하지만 아낙네들이 방 안에서 손으로 돌려야 하는 물레와는 원리와 목적이 영 다른 것이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이르러 영국의 산업혁명 결과 방적기계가 발명되고 기계직 면포를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산업혁명 이후 세계적인 면직물의 수요 증가로 지구상에서 목화의 재배 면적이 늘어나게 되었다. 미국의 미시시피강 연안이 목화 재배에 최적이라고 해서 그곳에 목화밭이 대량으로 조성되고 부족한 일손을 보충하기 위해 아프리카인 노예제도가 상당 기간 유지되었다. 현재는 중앙아시아와 북아프리카가 대표적인 면화 산지로 알려져 있다.
서양 문물의 도래와 함께 기계적 면포가 우리나라에 수입되기에 이른다. 일본의 침략 이후 조선방직, 경성방직 등의 주식회사가 설립되어 대량으로 생산된 면이 공급되면서 우리 사회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이리하여 폭이 넓은 역직기의 면직물이 많아짐에 따라 베틀로 농가에서 자급자족하던 무명의 제직은 점점 쇠퇴하기에 이른다. 표백 면포를 우리나라에서는 '샹목'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서양목(西洋木)의 준말로 '서쪽 나라에서 들어온 면포'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 광목이 많이 생산되고 유통되었는데 광목은 기존의 베틀로 잔 소폭의 무명과 비교하여 폭이 넓은 평직으로 짠 면포인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면방직 공장이 설립되어 광목과 옥양목이 대량 생산됨에 따라 우리나라 수직(手織) 무명은 거의 다 없어져 갔다. 무명은 광목에 비교하여 옷감 표면의 변화가 풍부하여 우리 일상 옷감에 적합하였으며, 이불, 요, 베갯잇으로 사용하였을 때 더 온화하고 푸근하다. 흰 옥양목은 손질을 잘하여 적삼, 치마, 바지 등 옷을 지어 입었는데 오늘날에는 화학섬유의 유통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지금까지는 식물을 원료로 한 의류에 대해 언급하였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동물성 섬유에도 관심을 가졌다. 견(絹)은 누에의 고치에서 풀어낸 실로 짠 직물이다. 고치를 만드는 누에의 품종은 원산지, 화성(化性), 면성(眠性) 등과 사육 시기, 색, 반문 등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된다. 화성으로는 1 화성잠, 2 화성잠으로 보통 분류되고 다화성잠도 있다. 면성은 누에가 유충기에 뽕잎을 먹지 않고 잠을 잔 뒤 변태하는 시기가 있는데 잠을 자는 횟수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보통 일반적으로 4면 잠이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3면 잠은 4면 잠에 비해 견사(繭絲)가 가는 것이 특징이다.
견직물은 중국 고대로부터 발달한 기술의 결정체이다. 중국의 견직물이 유럽에 전파됨으로써 이를 유통하기 위해 실크 로드가 개척되고 당시 유럽에서 비단은 고급품이었다. 견직물은 옛날에 종류가 다양했다. 주(紬), 사(紗), 라(羅), 능(綾), 금(錦), 단(緞), 곡(穀) 등의 이름이 쓰였고, 천연염료로 침염(浸染)된 직물, 침염 된 문양 직물, 그림이 그려진 회(繪) 등이 일반적인 종류였으며, 백(帛), 견(絹), 수(繡), 금니(金泥) 등 종류와 명칭이 다양하였다. 이들 가운데 오늘날까지 제직 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은 주, 사, 라, 능, 단, 금 등이다. 이들 가운데 주(紬)만이 명주로 명명되어 재래의 베틀로 극소량이 제직 되고 있고, 나머지는 현대화된 직기로 대량 생산될 뿐이다. 우리가 자랄 적에 어른들이 양복을 맞춰 입는 가게 이름에 ‘라사’가 들어가 있었는데, 그 연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대략 1세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농가에서는 집마다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쳤다. 지금의 서울 강남지역에는 예전에 뽕나무밭이 많았나 보다. 서초구의 잠원동(蠶院洞), 송파구의 잠실(蠶室) 등에 누에를 키우는 양잠 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한 세대 전만 해도 대학교 농과대학에 잠사학과가 있어 뽕나무 재배에서부터 누에 기르는 양잠 기술과 실을 뽑아내서 옷감을 만드는 견직에 이르는 기술을 하나의 학문으로 가르쳤다.
그다음 동물성 섬유로 인류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양털이다. 흔히 모직물(毛織物)이라고 하는 것이다. 동물의 가죽을 벗겨 의복을 만들어 입으면 겨울철에 따뜻하기는 하지만 무겁다. 양의 털을 깎아 실을 뽑아내고 이를 방직기를 이용하여 옷감을 만들고 의복을 만드는 기술에 인류가 착안하였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 동력과 방직기가 대형화되어 모직 제품의 공급이 확대되었다. 모직 제품이 처음 나왔을 때, 하층민들은 무겁고 뻣뻣한 양가죽 옷을 입었고 상류층 귀부인들은 가볍고 보들보들한 양모직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양털이 동물성이라고 하여도 그 근원은 양이 먹은 풀이고 그 풀은 태양의 에너지를 받아 광합성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양을 키우는 산업이 영국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등에 전수되어 오늘날 호주 대륙은 양모와 양고기의 대표적인 공급지가 되었다.
그 뒤 석유 관련 산업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석유에서 실을 뽑아내고 그 실을 방직기계에서 짜면 의복 재료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인류가 알게 되면서 역사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즉 이른바 합성섬유, 줄여서 합섬(合纖)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합섬의 원료가 되는 석유도 그 근원을 찾아가면 옛날에 태양의 에너지로 탄수화물을 합성해 낸 초목이다. 공과대학에 섬유공학과가 생기고 섬유의 성질과 방직기계와 관련된 기술을 가르쳤다. 우리나라에도 1960년대 이후에 합성섬유 직물 회사와 공장이 많이 생겨서 일자리를 제공하고, 경공업이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적으로 섬유공학과에서 방직기계 관련한 기술은 기계공학과로 흡수되고, 취급하는 직물 재료가 합성섬유가 주가 되면서 고분자 폴리머 기술이 중요하게 되어 섬유공학과가 화학공학과나 재료공학과로 개편된 대학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