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마태복음 6:25~31
윗글은 우리가 생활하는 가운데 의식주 중에서 의(입을 것)와 식(먹을 것)에 대한 우리의 자세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공중의 새는 돌보는 이도 없고, 먹이를 주는 이가 없어도 자유롭게 살아간다. 들의 백합화는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사람은 평소에 열심히 일하여 먹을 것을 쌓아 두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나 좀과 동록(銅綠)이 생겨 쌓아 둔 것이 변질되고, 어떤 경우는 도둑이 들기도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때그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이다. 많은 것을 쌓아 두는 자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많이 쌓아 두기만 하면 나누지 못한다. 쌓아 둔 재물은 썩을 것이고 다시 새것으로 채워 넣기를 반복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열심히 쌓으려고 하나 결코 쌓아 두지 못한다. 우리가 먹는 것은 하루 세끼에 불과하다.
여기서 '생각하라'는 그리스어로 '카타만타노(καταμανθάνω)'인데 깊이 사색하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전혀 기르지도 않고 먹이도 주지 않는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잘 생각해 보라는 뜻이다. ‘들의 백합화를 보라'는 의미는 백합화가 귀하거나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백합화는 흔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별로 받지 못하는 들풀이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도 들에서 잘 자란다. 우리는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보다 더 귀하다.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보다 우리는 더 귀하다. 여기서 백합화로 번역된 꽃은 우리나라에 존재하지 않는 식물로 오늘날 우리에게는 아네모네(anemone)라고 알려져 있다. 백합화의 ‘백’ 자 때문에 하얀색으로 알기 쉽지만, 꽃 색은 붉은색이 가장 흔하며, 흰색과 분홍, 노란색과 파란색도 있다고 한다. 모양과 특성은 우리나라의 양귀비꽃과 흡사하다고 한다. 백합화는 여러 가지 곧 일백 가지 효능이 합하여졌다고 해서 그리 이름 붙여진 것 같다. 이은상 작시의 가요 '동무생각'에는 '흰 나리꽃'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작금의 과학지식을 종합해 보면, 우리 몸은 입으로 흡수하는 탄소와 수소의 화합물인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등 영양물을 소화 과정을 통해 적당한 화합물로 변화시켜 혈액으로 공급한다. 이때 영양물의 분해로 생기는 찌꺼기들은 대변의 형태로 배출된다. 한편 호흡 과정을 통해 공기를 흡입하고 공기 중의 산소를 허파에서 걸러내서 혈액에 공급한다. 우리의 혈액에서는 영양물의 탄소 성분과 산소가 반응하여 연소가 일어나 물과 이산화탄소가 생기고 영양물이 가져온 에너지를 취한다. 연소 반응의 부산물인 물은 우리의 몸속에서 다른 용도로 재활용되다가 땀이나 오줌으로 배출되고, 이산화탄소는 허파를 통해 외부로 배출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밥심(밥의 힘)으로 일한다‘ 또는 ’곡기를 끊으면 죽는다‘는 말이 이런 과정의 반증이다. 연소 반응이 일어나는 온도와 방출되는 에너지의 양이나 에너지의 변환 방법이 조금 다를 뿐, 우리 몸에서나 내연기관인 엔진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원리적으로 같다. 내연기관에서는 연소 반응이 잘 일어나도록 사전에 원료 처리를 잘해서 연료라는 형태로 연소실에 공급하고 반응의 생성물을 기체의 형태로 공기 중에 배출한다. 반면에 우리는 음식물을 바로 입으로 넣고 몸 안에서 소화 과정을 통해서 영양물을 준비하여 연소 반응이 잘 일어나게끔 하고, 사후에 고체인 배설물을 처리하는데, 이 점이 일반 내연기관과 다르다.
이와 같은 생리적 현상은 모든 동물에서 비슷하게 일어난다. 다만 먹이라는 이름의 섭취물이 달라, 초식동물과 육식동물로 나누는데, 초식과 육식이 둘 다 가능한 동물도 있다. 풀만 먹고 큰 힘을 내는 소나 말, 코끼리 등이 경이롭다. 육식동물은 초식동물을 섭취하여 영양물을 얻는다. 우리는 이를 먹이사슬이라고 한다. 인간은 풀과 곡물을 먹을 수 있고, 육식도 가능하나 개성에 따라 선호도가 다르다.
유대인들은 코셔(kosher)라고 종교적으로 허용된 식재만 사용하고 있다.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을 채식주의자(vegetarian)이라고 한다. 요즘은 비건(vegan)이라는 용어도 쓰인다. 인도 사람 중에 채식주의자가 많다. 인도에서 영국으로 유학 간 학생이 여전히 채소와 곡물만을 섭취했는데, 시름시름 앓게 되었다. 원인을 분석해 보니 영국의 식료품점에서 사다 먹는 채소는 물에 잘 씻은 것이었다. 고향에서 먹은 채소는 대충 씻어서 무기물이나 벌레알들이 묻어 있어 자신도 모르게 영양의 균형이 맞았는데, 영국에 와서는 이 균형이 깨졌기 때문이라는 유머를 들은 적이 있다.
어쨌든 모든 생물의 시초는 초목이다. 초목은 이파리의 엽록소에서 태양에서 오는 에너지를 흡수하여 뿌리에서 흡수한 물과 공기 중에서 흡수한 산소를 반응시켜 탄수화물을 만든다. 태양에서 온 에너지는 풀이나 곡물 속에 들어 있다가 동물의 몸에 들어온 뒤에 탄소 성분이 산소를 만나 연소되면 다른 에너지로 변환된다. 그 에너지의 대부분은 열에너지로 바뀌어 우리의 체온을 생명 현상이 일어나기 적절한 온도로 유지하는 데에 사용된다. 근육에서는 이 에너지를 바로 운동에너지로 바꾸는 반응이 일어난다. 머리로 사고하는 데에도 에너지가 소모되고, 장기의 작동에는 전기적 에너지가 작동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 몸은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 데 영양물을 사용하고 남으면 몸에 저장해 둔다. 이른바 살이 되는 것인데, 뱃살이니 똥배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이를 비만(肥滿)이라고 부른다. 식물의 경우 비료를 많이 주면 웃자란다. 비료를 잘 못 치면 그 식물이 죽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이 사람에게도 일어나서 비만은 많은 질병을 유발할 수 있다. 한자어로 암(癌)은 입이 세 개로 많아서 산처럼 많은 음식을 먹어 생기는 질환이다. 옛날에 못 먹고 잘 먹지 못하던 시절에 비만한 어린이를 우량아라고 하고 배 나온 중년을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등 부러워했지만, 잘살게 된 요즈음에는 체중을 줄이기 위해 의사들은 덜 먹는 다이어트를 권하고, 찐 살은 운동을 열심히 하여 태워버리라고 권면하고 있다.
우리 인간은 천성적으로 식욕이라는 본능이 있어서 잘 먹어 치운다. 또한 미각이나 후각 심지어 ’보니 먹음직스럽다‘라는 표현에서도 보듯이 시각조차도 식욕을 자극하고 있다.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실험에서는 개를 이용했지만, 이는 인간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을 객관화한 실험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식욕을 자극하기 위해 재료 본연의 맛을 즐긴다는 명분으로 다양한 식재가 개발되었다. 오죽하면 다리 달린 것은 책상 빼고, 날아다니는 것은 비행기 빼고, 인간이 다 먹는다는 말이 있겠는가? 이른바 요리라는 이름으로 조리 방법이 연구되고 이에 종사하는 직업이 생겨났다.
요리사 또는 조리사라고 불러도 충분할 터인데 요즈음 방송에서는 셰프라고 해서 선망의 직업으로 묘사하고 있다. 셰프는 프랑스어로 chef, 영어로는 chief, 우리말로는 주방장의 의미이다. 유명한 셰프는 현대 요리의 원조 격인 프랑스나 미국 혹은 중국에 유학하고 현지의 유명 음식점에서 근무한 경력을 제시한다. 보통 주방장 밑에는 주방보조(helper)라는 조리사가 있어서 주방 안의 막일은 그 사람이 한다. 옛날에는 요리사가 우리에게 소화가 잘되는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려고 노력했겠지만, 요즈음에는 미식가를 위해 음식의 양도 아주 조금만 만들어 식탁에 올린다. 그러다 보니 역사적으로 조미료, 향신료, 양념 등이 문화마다 다양하게 개발되었다.
서양의 역사를 견인한 유럽인들이 경작으로 어느 정도 먹는 문제를 해결한 후 해외 식민지를 개척한 시기인 이른바 대항해시대에 몇 가지 기호 식품이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 유행하였다. 커피, 차, 사탕수수, 사탕무, 후추 등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런 식료품들이 유럽에서 인기가 있으니까, 식민지 사업자들이 진출한 지역에서 이를 재배하여 유럽으로 반입하려는 시도가 있게 되었다. 이 작물들의 씨나 묘목을 원산지에서 가져와 기후와 생육조건이 유사한 자신의 식민지에서 재배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조성한 농장을 플랜테이션(plantation)이라고 하였는데, 식물을 의미하는 plant에서 파생된 말로써, plant에 공장이란 의미도 이렇게 해서 부여된 듯하다.
인류의 식욕은 참 엄청나다. 인류의 역사와 사회 발전은 먹는 문제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식품을 효율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사회가 형성되고 국가가 생겨났고, 전체를 위해 일부의 희생이 강요되었고, 국가 간에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먹는 문제를 조직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제도가 제안되고, 산업, 상업, 금융 등 경제 제도가 생겨났고, 과학과 기술이 발달했다. 또한 먹고살 만해지니까 예술이 생겨나고 문화생활이 가능해졌다.
煮豆燃豆基 (콩을 삶는데 콩깍지로 불을 때니)
豆在釜中泣 (콩은 솥 속에서 슬피도 우는구나.)
本是同根生 (본래 한 뿌리에서 나왔거늘)
相煎何太急 (어찌 들볶기를 이렇게 급하게도 하는고?)
- 조식, <칠보시>
그 유명한 중국의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한다. 위나라의 조조가 죽은 후 대권을 차지한 아들 조비는 그간 아버지의 아낌을 받던 조식이 자기 자리를 넘보지 않을까 염려하게 된다. 그는 조식을 불러들인 후 문죄하기를 ’아버님께서 생전에 너를 사랑하셨던 것은 너의 뛰어난 문장 때문인데 요즈음 들으니 그 글들은 네가 지은 것이 아니라 하니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아버님을 속인 것일 뿐 아니라 천하 백성을 속인 일이니 그 죄를 면치 못하리라. 그 진위를 알기 위하여 시제(詩題)를 줄 터이니 일곱 걸음을 옮기기 전에 시를 지으라‘고 했다. 모든 사람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일곱 걸음이 떨어지자 조식이 입을 열어 시를 읊었다. 한 어머니 배에서 태어나 서로를 해치려 함이 마치 콩과 콩깍지 같음을 비유한 이 시에 조비도 부끄러움을 느끼고 조식을 제거할 생각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다. 형의 폐부를 찌르고 자기의 목숨을 구한 이 시를 일곱 걸음에 지었다 하여 칠보시(七步時)라 하기도 한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콩이라는 식물이 만들어 낸 열매가 우리에게 식량이 되지만, 그 껍질이나 몸채는 또한 땔감이 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못 살 때는 겨울에 추위를 이기고자 산에서 초목을 채취하여 연료로 사용하였다. 양이나 염소를 키우며 유목 생활을 하는 몽골인들이나, 북극권에서 순록을 키우는 에스키모인들은 여름철에 풀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동물들을 먹인다. 추운 지역이라 초목의 생장이 어려워 이들 동물이 뜯는 풀의 크기는 정말 보잘 게 없다. 그래도 동물들은 그것을 열심히 섭취하여 몸속에서 단백질이나 지방을 만들어 살로 저장해 둔다. 동물의 살이나 우유가 사람들의 양식이 된다. 현지인들은 동물들에게 풀을 뜯기면서 동물의 배설물조차도 버리지 않고 모아뒀다가 겨울철에 땔감으로 쓴다. 그 배설물의 원천은 풀이요, 겨울철에 배설물을 태워서 얻는 열에너지의 근원은 종국에는 태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