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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트 강 Jan 28. 2023

A8. 백(白, white)

월백(月白), 명랑한 흰 빛에

梨花(이화)에 月白(월백)하고 銀漢(은한)이 三更(삼경)인 제

一枝春心(일지 춘심)을 子規(자규)야 알랴마는

多情(다정)도 病(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하노라. 

- 이조년(李兆年)(1269~1343), 시조     


이 시조에는 배꽃이 활짝 핀 달밤에 들려오는 소쩍새 소리를 들으며 봄의 정취에 빠져 있는 이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배꽃이 활짝 핀 어느 봄밤, 하늘에는 달이 활짝 뜨고 은하수가 흐르고 있다. 달빛이 하얀 배꽃에 비치어 더욱 아련하게 보이는 고즈넉한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이 풍경 속으로 두견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두견새가 이 밤에 느끼는 작가의 정취를 알고 우는 것은 아니겠지만 두견새의 울음소리로 봄밤의 애상적 정취는 더 깊어진다. 화자는 아름답고 고즈넉한 봄밤을 홀로 두기 아쉬운 마음에 잠 못 들고 서성이고 있고, 두견새는 봄밤에 자지 않고 혼자 서성이는 화자를 홀로 두기 아쉬운 마음에 자지 않고 울고 있다. 달이 희도록 밝은 밤의 일이다.      


늦은 밤에도 도시에는 쉽게 불을 밝힌 가게들이 있어서 달빛을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 지나칠 때가 많지만 전통적으로 우리 문화에서 ‘월백(月白)’, 달의 흰 빛은 특별하고 반가운 것이었던 듯하다. ‘명랑운동회’의 경우처럼 다소 뜬금없는 곳에 붙어 있는 ‘명랑(明朗)’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맑고 밝음’, ‘밝고 쾌활함’이다. 그런데, 한 세기 전 우리말로 번역되었을 찬송가 가사를 보면 우리 조상들이 ‘명랑’이란 말을 어떻게 썼는지 알 수 있다.     


광명한 해와 명랑한 저 달빛, 수많은 별들 비치나,

(Fair is the sunshine, Fairer still the moonlight, And all the twinkling starry host;)    

- 새 찬송가 32장 3절, <만유의 주재>     


사전적인 의미로는 ‘공평한, 정당한’이라는 의미를 갖는 ‘Fair’라는 단어를 원곡에서는 햇빛을 묘사할 때 썼는데, 역자는 이를 ‘광명한’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한편 원래 곡에서는 이 단어의 비교급인 ‘Fairer’란 말을 달빛을 묘사하는 데 썼는데, 번역자는 ‘명랑한’이라고 번역하였다. 달빛이 밝고 낭랑하게 빛나는 고요한 한밤의 분위기에는 ‘명랑하다’라는 형용사가 제격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옛사람들은 왜 달빛을 ‘명랑하다’라고 생각했을까? 달이 등장하는 몇몇 문학 작품들을 짚어보면 그 이유를 조금은 짐작해 볼 수 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 박목월(1915~1978), <나그네> 중에서     


박목월의 시 <나그네>에는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는 표현이 나온다. 일일이 발품을 팔아 먼 길을 이동하던 시절에는 한겨울이 아니고서는 대낮 햇볕 아래 움직이기보다는 한밤에 명랑한 달빛을 벗 삼아 먼 길을 걸어서 갔을 것이다. 구름 조각 사이 갈라진 틈서리로 비치는 달빛은 씻은 듯이 맑고 아름다운 ‘명랑한’ 빛이다. 바람이라도 불어 흘러가는 ‘구름의 발’이 빨라지게 되면 달은 날개가 돋친 듯 날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비슷한 풍경이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강원도 산골에서 오일장마다 장소를 옮겨 다니며 물건을 팔던 장돌뱅이들은 한밤에 산길을 걸어서 넘어 다녀야 했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한다. 달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 이효석(1907~1942),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봉평장에서 대화장까지는 팔십 리 길이어서 하룻밤 내내 걷거나 나귀를 타고 가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한여름에 명랑한 달빛 아래하얀 메밀꽃이 피어 있는 산길을 동행이 있어 같이 가노라면 외롭지도 않고 힘도 안 들게 느껴질 것이다더우면 냇물에 뛰어들어 시원하게 목욕도 한다.


요새도 여전히 밤에 달을 보면서 그 명랑함에 힘을 얻는 사람들도 있다. ‘명랑한’ 달빛의 전통을 소설가 공선옥의 소설 <명랑한 밤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처절하게 실연당해 밤길을 정처 없이 걷던 주인공 여자가 네팔과 방글라데시에서 온 두 명의 이주노동자를 치한으로 오해하고 숨었다가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으로 이어진다. 둘 중 한 명인 깐쭈라는 네팔 사람은 슬플 때마다 꿈속에서 보곤 했던 네팔의 달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주인공은 노래를 부르며 길을 떠난다. 이 소설이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저기, 네팔의 설산에 떠오른 달이 보인다. 나는 달을 향해 나아갔다. 비를 맞으며 천천히, 뚜벅뚜벅, 명랑하게. 

- 공선옥(1963 ~ ), <명랑한 밤길> 중에서    


이 소설의 ‘명랑’ 역시 달과 이어진다. 달 때문에 고달프고 슬픈 밤길도 명랑할 수 있다. 희도록 밝은 달, 달처럼 밝은 흰색에는 ‘명랑함’이 담겨있다.

봄 벚꽃놀이 중에 찍은 벚꽃


달밤에 흰 배꽃이나 메밀꽃을 좋아하던 우리 민족의 감성이 요새는 벚꽃 밑에서 발하는 듯하다. 4월 초쯤에 서울 여의도나 경남 진해에서 벌어지는 각종 벚꽃 축제에 많은 사람이 몰리고 있다. 이제는 달빛이 아니라 도심의 가로등 불빛이 대신하고 있다. 사람들은 하얀 벚꽃 밑에서 휴대전화로 인증숏을 찍기에 바쁘다. 이럴 때 봄비라도 오면 바람에 하얀 꽃비가 눈처럼 흩날린다. 그래 봐야 어차피 며칠이면 지게 되는 꽃의 운명 아니더냐? 꽃은 지고 어서 열매인 버찌를 맺어야 하지 않겠는가? 벚꽃을 일본인이 좋아하고 일본의 국화라고 알려져 있는데, 원산지는 우리나라라는 설이 있다. 일본인의 영향 때문인지 미국이나 유럽에도 벚꽃이 많이 보급되어 있다. 미국 워싱턴시의 벚꽃놀이는 나름 유명하다.


별들이 반짝이는 까만 밤

흰 눈이 살며시 내려와

지붕 꼭대기 용마루에

하얀 목도리를 씌어줬네요.

장독대 머리 위에도

하얀 벙거지 모자를

씌어놓고

(하략)   

- 이종수(1958~ ), <눈 내리는 밤>


장성 장독대에 쌓인 눈 -한규석 작품


우리의 주위에 흰색 물체는 꽤 많다. 눈과 얼음은 흰색이다. 정월에 사흘 연속하여 흰 눈이 내리면 이를 삼백(三白)이라 하였다. 서설(瑞雪)이라는 말도 있고,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서양 풍습에도 좋은 의미를 담고 있다. 빙하의 색깔은 흰색으로 태양에서 오는 빛을 대부분 반사하여 에너지가 지구에 과도하게 축적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과도한 화석 연료의 사용으로 지구온난화와 기상이변이 초래되어 극지방이나 고산 지역의 빙하가 녹아내려 온난화를 더욱 촉진한다고 보고 있다. 종이의 색깔은 대부분 하얀색이다. 흰 종이를 백지라고 하며 그 위에 검은색의 연필이나 잉크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 백지위임, 백지수표, 백지상태 등에 ‘백지(白紙)’가 쓰이고 있다. 종이뿐만 아니라 깃발도 흰색이 있는데 좀 유별나다. 백기투항(白旗投降)이란 말에서 보듯이 전쟁 중에 적에게 무조건 항복할 때는 흰 깃발을 들고나갔다. 백색의 십자가는 스위스의 국기이다. 주위 국가에 중립을 지킨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착안하여 적십자(赤十字)와 녹십자도 생겨났다. 한편 ‘걷는 또는 이동하는 병원’이라는 뜻의 환자수송용 구급차인 앰뷸런스(ambulance) 자동차는 흰색이다.


열매의 속 색깔은 보통 흰색이다. 쌀이든, 밀가루든 곡식의 색깔이나, 사과든, 배든 과일의 속 색깔은 대부분 희다. 장단 삼백(長湍 三白)은 임진강 유역의 장단 지방에서 나던 벼, 콩, 인삼의 색깔이 흰 데서 유래된 말이다. 곡식의 껍질은 희지 않더라도 곡식의 속은 대부분 희다. 외부에서 비취는 빛을 흡수하지 않고 대부분 반사해서 희게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에너지를 흡수한 낱알이 쉽게 변질(變質)되어 부패한다. 낱알은 함유된 수분이 충분히 제거된 상태로 말려야 썩거나 벌레가 생기지 않고 오래 보관할 수 있다. 수박처럼 속에 색깔이 있거나 수분이 많으면 오래 둘 수 없고 곧 먹어야 한다. 열매는 아니나 우리가 식용하는 것 중에 하얀색이 있는데, 바로 소금이다. 소금을 영어로 salt라고 하고 급료를 salary라고 하는데, 이는 고대 로마 시대에 소금을 군인 등의 급료로 지급한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소금을 급료로 받은 공무원은 그것을 시장에서 다른 생필품으로 교환해서 썼으리라. 바닷물을 건조해서 만든 소금은 하얗지만, 내륙 산지에서 출토되는 암염은 불순물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렇지 못하다. 또 다른 ‘백색 가루’로 대마초 추출물 등이 있다.


아이보리(ivory) 비누라고 흰색의 비누가 있다. 아이보리는 코끼리의 치아인 상아(象牙)를 의미하는데 둘의 색깔이 비슷하다. 보통 비누의 색깔은 ‘빨랫비누’에서 보듯이 누런색이다. 별로 깨끗해 보이지 않아 그 ‘빨랫비누’로 세수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 손빨래하는 데에만 쓴다. 요즘은 세탁기에 세탁물과 하얀 세제를 넣고 스위치만 누르면 된다. 아예 건조까지 되는 세탁기도 있다. 아이보리 비누는 제조 도중에 액체 원료를 혼합하는 과정에서 마이크로미터 크기의 공기 방울을 생기게 하고 굳히면, 고체 비누 내부의 기포(氣泡)에서 빛의 산란이 일어나 흰색으로 보인다. 그 결과 깨끗한 느낌을 주고, 비누에 빈 공기 방울이 들어 있어 비중이 작아 물에 뜨기도 한다. 요즘은 흰색의 비누가 기본이지만, 아이보리 비누가 처음 시장에 나왔을 때 대단한 히트 상품이었다. 영어로 ‘soap drama’라고 들어 본 적이 있으신가? 요즈음 우리 실정으로 보면, ‘막장 연속극’이라는 뜻이겠는데, 옛날에 미국 라디오나 TV에서 일일연속극이 방송되기 전후에 비누 광고가 있어서 그런 말이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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