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저 교환학생 가도 돼요?“
서류 제출, 학과장 승인, 면접 최종합격까지 받은 날. 사실상 물음이 아닌 통보였다.
당시 대기업 인턴을 다니고 있었다. 번쩍이는 건물로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출근하고, 내 기준 ’진짜 어른‘ 으로 여겨지는 나이스한 직장인들과 일하고, 좋은 말 많이 듣고. 만족스러운 우물 안 개구리 생활 중 상사분이 ”교환학생 생각 없어요?“ 라는 말씀을 하셨다. 기회가 되면 꼭 가라고 하셨다. 손에 꼽는 경험이었다고. ‘얼마나 재미있었으면 10년도 넘은 얘기를 저렇게 재밌게 하시지...’ 한 학기 동안 정말 놀다만 온 이야기를 듣는데 욕심이 났다. 안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 압축되어 있던 해외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이 스멀스멀 부풀었다.
휴학하자마자 일했으니까 복학 전에는 놀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취업하려면 노는 것에도 명분이 있어야 하기 마련. 그런 의미에서 ‘교환학생’이라는 키워드는 한량의 삶을 예쁘게 포장해 줄 아주 좋은 명분이 되었다.
‘알아나 보자. 돈 드는 거 아니잖아?’
생각하는 국가는 선택지가 없었다. ‘중화권’ 딱 하나였다. 나는 영어를 못했고, 공인 영어 점수도 없었다. 이제 와서 공부하기엔 곧 서류 접수 시즌이었고, 영미권은 항상 경쟁률이 세기 때문에 역부족이었다. 나에게 어학점수라면 대학교 2학년 때 위기감을 느끼고 독학으로 따놓은 중국어 HSK 3급이 전부. 이 작고 소중한 어학점수로 갈 수 있는 교환 학교가 있을지 반신반의하며 전년도 커트라인을 알아봤다. 이 급수로 갈 수 있는 학교가 있나...? 헐 있다. 지원자격 3급 이상. 대박.
분명 ‘알아나 보자’로 시작했는데 눈 떠보니 회사 반차내고 학교 면접장에 와 있었다. 편입했다고 해도 나름 2년은 다녔는데, 저마다 ‘중국어과’, ‘관광과’ 라며 소개하는 낯선 얼굴들과 함께 면접을 봤다. 중국에서 살다왔다는 학우, 중국어 5급이 있다는 학우 등 쟁쟁한 후보 사이에서 머쓱하게 앉아있다 ‘학생은 시각디자인과인데 왜 중국을 가려하느냐’라는 면접관님의 질문에 ‘활자를 좋아합니다.’라는 밍밍한 답변만 남기고 나왔다.
1 지망은 대만 (익히 아는 대로 중국은 간체자, 대만은 번체자를 사용한다. 나는 번체자를 배운 적이 없음에도 ‘대만 참 좋은 나라다’ 식의 말을 들은 적이 있고, 국립대학이라는 이유로 1 지망에 대만을 적었다. 이것만 봐도 얼마나 생각 없이 교환학생을 계획했는지 알 수 있다.), 2 지망은 중국으로 적어 냈었다. 죽을 쑤고 나온 면접이었기에 아예 떨어지더라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중한 반차와 맞바꾼 면접이 끝난 후, 동네도 아닌데 매번 가곤 하는 판교 투썸플레이스에서 잡생각들과 함께 케이크를 씹어 삼켰다.
‘떨어지면 졸업전시 뭐 하지... 면접 준비 좀 할걸...’
중국어 자기소개 발음을 조금 더 굴렸어야 했나, 간절함을 더 어필했어야 했나. 자책의 시간을 이틀 째 가지던 중 전화가 왔다. 저장해 둔 ‘국제교류원’ 이름을 보자마자 바스락거리는 나일론 치마 입은 것도 까먹고 용수철처럼 사무실의 긴 복도를 우다다 뛰쳐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국제교류원입니다.
학생 본인 맞으시죠? 교환학생 관련해서 전화드렸습니다. 현재 신청하신 1 지망 대만은 힘들고, 2 지망 중국은 TO 있어서 가능한데 파견 의사 있으신가요?“
“안녕하세요! 네... 희망합니다.”
“네. 자세한 사항은 문자로 안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으니 얼마 안 있어 최종 합격 문자가 왔다.
[‘축하드립니다. 24년도 1학기 교환학생 최종 합격 하셨습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합격 문자를 인스타에 올렸더니 ‘대박 갑자기?’, ‘무슨 애가 중국어도 자격증이 있냐...’, ’근데 왜 중국임?‘ 다양한 반응이 답장으로 쏟아졌다.
와 근데 이거 부모님께 어떻게 말씀드리지.
알아주는 기업에서 일도 했겠다, 4학년 복학하면 월급으로 1년 학비 충당하고 무난히 졸업하면, 한 명 해결 (우리 집은 세 남매다.)인 줄 알았는데... 냅다 교환학생을 가겠다니. 맨날 일 벌여놓고 통보하는 첫째 딸에게 적응하신 건지, 엄마는 놀라진 않으셨지만 “알아는 봤어? 집안에서 너 지원해 줄 돈 없어. 가려면 너 돈으로 가야 돼.”라고 하셨다. 당시 아파트 분양, 둘째의 대학 입학, 셋째의 학원비가 줄을 서있었기 때문에 번호표를 뽑아도 최소 4번이었다. 예상한 답변이었다. 두 번째 카드를 꺼냈다.
“알아봤어요. 생활비는 제가 번 돈으로 감당할 테니까 학비만 도와주실 수 있어요?”
“다녀와. 지금 아니면 또 언제 가겠어.”
옆에서 듣고 있던 아빠가 말씀하셨다.
맏이자 하나뿐인 딸이 합법적인 무언갈 한다고 하면 99.9% 오케이를 외쳐주시는 헤드헌터 아빠 덕분에 나의 무계획 타지살이를 향한 여정은 비교적 무난하게 스타트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