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indy Sep 08. 2024

떠나자. 망해도 콘텐츠가 될 터이니

“저 중국 갈까요 말까요...”

연초의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이렇게 물어봤다. 유학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 교환학생을 다녀온 사람 등 나에게 “무조건 가라“ 고 말해줄 사람들에게. 답정너 그 자체였다. 당시의 나는 그런 치사한 방식으로라도 타인을 통한 ’경험이 주는 가치‘ 의 확신이 필요했다. 학교 에브리타임에서 합격한 학교로 교환학생을 다녀온 사람을 애타게 찾아봤지만 나오지 않았고, 디자인 전공생 중 막학년에 교환학생을 다녀온 사람도 없었다. 즉, 아무도 안 가본 길이란 소리였다. 안 가본 길이 새로운 길을 만들고 어쩌고저쩌고... 이런 명언 따위 당시엔 하나도 위로되지 않고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무도 안 가는 길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곧은길 두고 먼 길로 돌아갈 필요가 없으니 택하지 않는 거였다.


“다녀오세요. 아무것도 안 얻고 와도 돼요.“

출국 1달 전. 대외활동으로 연이 닿은, 파리로 교환학생을 다녀오신 분과 오랜만에 가진 식사 자리에서 피자를 먹다가 눈물을 쏟았다. 갈색 냅킨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었고, 어둑하고 힙한 펍은 삽시간에 금쪽상담소가 됐다. 독심술을 배우셨나 싶을 정도로 귀신같이 내가 듣고 싶었던 말만 쏙쏙 골라서 해주셨다. 원래 그렇게 다 가기 전엔 엉망진창이에요. 저도 출국 직전까지 비자 안 나와서 고생했어요. 간 곳도 어쨌거나 사람 사는 곳이라 그렇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집 오는 길에 메모장을 켰다. 해주셨던 말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내려 갔다. 한 문장도 빼먹고 싶지 않아서 토해내듯 적었다. 적으면서도 눈물이 고였는데 지하철에서 폰 보면서 우는 이상한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아서 꾹 참았다. 더 이상 생각나는 게 없다고 느꼈을 때 어쩌면 스스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일수도 있는, 메모장 한 바닥을 채운 격려의 메시지를 찬찬히 읽었다. 한바탕 울어서인지 따뜻한 응원 덕인지 이유 모를 후련함을 느꼈다.


”지금 고민하는 게 고작 졸업전시 때문이라고요?“

출국 3일 전. 빠진 게 없나 체크리스트를 한 번이라도 더 확인해도 모자랄 판국에, 해외 유학을 고려 중이신 선배님을 찾았다. 이미 졸업 후 필드에 계시는 학교 같은 과 선배님은 내 물음에 ‘종이빨대가 종이로 만든 거냐’는 질문을 들은 듯 황당한 표정을 지으셨다. 당연히 가야죠, 그때밖에 못 가잖아요. 요즘 중국 디자인이 얼마나 뜨는데. 인스타그램으로 팔로우 중인 중국 디자인 스튜디오 계정을 공유해 주시며 학생 때 교환학생 안 가본 건 정말 아쉽다고, 번 돈을 다 쓰고 와도 무조건 가는 게 남는 장사라고 하셨다. 날이 풀리지 않은 2월 말, 한국인들 답게 시킨 아이스커피와 라떼를 다 비우고 얼음이 녹을 때까지 진로. 학업. 유학 등 다양한 주제로 몇 시간가량을 이야기한 중구난방 토크는 ‘어찌 되었건 경험이 남는 거다’라는 결론으로 귀결되었고, 친분이랄 것도 없는 후배에게 밥을 사주며 ‘보니까 알아서 잘하는 사람 같던데 걱정 말고 재밌게 놀다 오라‘ 고 해주신 선배님께 감사해서라도 씩씩하고 무탈하게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응원 잔뜩 받고서 안 간다고 무르는 건 자존심이 용납 못한다. 일단 가보자. 가서 친구 못 사귀면 틀어박혀서 중국어 공부하거나, 책을 매일 읽자. 국제 미아 되면 브이로그 찍어서 유튜브를 하는 거야. 망하면 망한 대로 콘텐츠가 되는 세상이니까.‘




영원히 올 것 같지 않던 출국 당일날. 밤새 캐리어를 열고 닫느라 밤을 새운 채 새벽을 맞이했다. 아빠가 자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하셨지만 평소 멀쩡히 만 타던 차가 그날따라 시동이 안 걸렸다. 그냥 택시 타고 갈게요 괜찮아요. 미안해하는 아빠, 문자로 택시비 보내라는 엄마와 짧은 포옹 후 카카오택시를 잡아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동트기 전 어스름한 하늘이 센치해지기에 제격이었다. 인천공항까지 이동하는 1시간 내내 택시기사님은 말을 걸지 않으셨고, 나는 카더가든 노래를 들으면서 사색의 시간을 가졌다.


“책 기내용으로 빼고 26kg까지 맞춰요.“

공항에 도착 후 가장 먼저 수하물 측정부터 했다. 초과할 건 알았지만 예상외로 무게가 많이 나가는 짐이었다. 측정기 앞에서 몸만 한 캐리어를 쫙 열고 문제집. 세계문학전집. 공책등을 재정렬하던 중, 유튜브를 이어폰도 안 끼고 보시던 할아버지가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씀하셨다. 네?


“수하물 부칠 때 (23kg 기준) 3kg 초과까지는 봐주니까, 책은 들고 타라고.”

“아아. 감사합니다.”


쭈그려 앉아 감사인사를 드렸더니 할아버지는 탑승시간이 되신 건지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말씀대로 책가방에 서적류를 전부 욱여넣고 캐리어를 닫은 뒤 추가요금을 결제했다. 어림잡았던 금액의 반이 덜어진 영수증을 받았다. 역시 어른들 말 들어서 틀릴 것 없다더니.


같은 학교로 파견 가는 관광학과 동기와는 비행기를 따로 타고 갔다. 가기 전부터 스몰토크 할 만큼의 심리적 여유가 없었기에 입국심사 하는 곳에서 만나자고 했다. 체할 것 같아서 아침도 안 먹고 왔는데 시간이 많이 남아, 공항 내 일찍 문을 연 가게에서 쌀국수를 시켰다. 매운맛을 시키고선 직원분이 새빨간 국물을 앞에 놓아주었을 때에야 빈속이라는 게 생각났다. 이 정신머리로 무사히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생각하며 면발을 씹었다.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씹어 삼킨 쌀국수로 배를 채우고, 일찍 대기를 서 앞순번으로 비행기에 탑승했다. 이륙 전 혼잡한 기내에서 뭐라도 읽어보고자 책가방 속 뒤죽박죽 섞인 서적들 사이 인간실격을 꺼냈지만 안 읽혔다. 정신이 딴 곳에 있는데 읽힐 리가. 얻어걸린 창가좌석에 앉아 창 밖을 봤다. 구름이 낀 건지 미세먼지인 건지. 탁하고 흐린 게 꼭 내 앞날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비행시간은 1시간 45분. 한국과 가까운 지역인 제남(지난)으로의 비행은 경기도민의 마곡 출퇴근 시간보다 짧았다. ‘나는 그간 비행기 왕복 시간을 매일 회사에 할애했던 것인가’, ‘하도 가까우니 가족 보고 싶어서 울 일은 없겠네’, ‘수틀리면 그냥 집 가도 될 듯’... 애매한 시간에 잠도 못 자고 꼬리를 무는 쓸데없는 상상만 줄곧 했더니 어느새 중국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조용하다. 미디어에서 보이던,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왁자지껄 이미지와는 확연히 달랐다.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 발을 딛고 충격 먹었던 이국스러운 향도 없었고, 한국어로 쓰여있어야 할 글자들이 중국어로 쓰여있다는 것과 사람들이 한국어가 아닌 중국어를 뱉는다는 것. 처음 느낀 모국과의 차이점은 그 정도였다. 저마다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입국장에서 깐쫑하게 하나로 올려 묶은 채 양손에 짐을 들고 가던 동기와 눈이 마주쳤다. 염색하셨네요! 새빨갛게 머리색을 뺀 나를 보며 말했다. 한국에서도 여행을 앞둔 사람처럼 ’빨리 중국에 가고 싶다 ‘고 말했던 동기의 얼굴엔 신남과 설렘이 쓰여있었다.


“네... 더 먹기 전에 해봤어요.”

“잘 어울려요!”


감사합니다. 이유 없이 체력이 실시간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나란히 입국심사 서류를 작성하러 갔다.


언어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과 실전 회화는 땅끝 차이다. 심지어 베이식한 자격증을 취득한 입장에서 읽을 수 있는 단어는 극히 적었다. 수표 크기의 서류를 양면으로 작성하라는데, 프린팅 된 글자들은 아는 단어보다 낯선 단어가 훨씬 많았다.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당황을 하니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도와주세요’가 중국어로 뭐였더라. 헬프 미...? 이건 영어잖아. 옆을 보니 나보다 중국어 실력이 좋은 동기 또한 뚫어져라 종이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름과 전화번호 등 기본 사항만 작성한 서류를 들고 10분 정도 눈알만 굴리다, 정복은 입었지만 험악해 보여 말 걸기를 속으로 한참 고민했던 사람에게 가서 최대한 착한 표정으로 서류를 들이밀었다. 그는 내민 서류와 나를 번갈아 한 번씩 보더니 ‘외국인이군’ 판단을 끝낸 듯 볼펜을 들고 공통 사항을 체크해 준 뒤 돌려주고는 심사 줄을 서라는 손짓을 했다. 谢谢. 중국에서 내뱉은 첫 중국어였다.


걱정리스트 상위권에 올라있던 중국어 입국심사는 예상외로 순조롭게 마쳤다. 학생이구나. (네) 공부하러 온 거지? (맞아요) 이쪽으로 나가면 돼. 여권에 붙어있는 X2 학생비자 자체로 신분증명이 되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초스피드로 끝난 심사를 거치고 나왔더니 멀리서 학교 이름으로 된 팻말을 들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여자애 둘이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머쓱하게 웃으면서 다가가니, 우리가 입을 열기도 전 선생님 또한 알아보셨다.


“안녕, 나는 너희 담당 선생님이야. 오느라 고생 많았어!“

중국인이셨고, 영어에 능하셨다. 중국에 오는데 중국어를 입에 붙이려는 노력도 안 하고 온지라 영어로 소통했다. 내 인생에서 영어를 이렇게 많이 쓰는 날이 올 줄이야... 선생님께선 중국 입성 기념사진을 찍으라고 하셨다. 목에 걸고 오신 캐논 카메라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뭐라 답변할 틈도 없이 손에 대학명이 크게 박힌 긴 현수막과 아까 봤던 팻말이 빠르게 쥐어졌다. 아오, 이럴 줄 알았으면 갖춰 입고 오는 건데. 탈색 두 번으로 푸석해진 빨간 머리칼과 초록 플리스, 물 빠진 청바지. 편의점에 음료수 사러 나온 모습으로 이국생활의 첫날을 기록했다. 한바탕 포토타임이 끝난 후에야 정말 모든 절차가 끝났다는 듯 선생님은 두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말씀하셨다. 웰컴 투 차이나.

이전 02화 이렇게까지 하면서 가야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