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곰! 삶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깨닫다.
헤난리조트에서의 시간은 어느덧 끝이 났다. 11시에 체크아웃을 한 것 같다. 내가 세운 계획은 아내 통순에 의해 바뀌기 마련이라, 내 계획 따위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 내 일정상 지금쯤이면 헤난리조트 인피니티 풀에서 마지막 수영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미 체크아웃이 돼버린 거다. 체크아웃이 참 무섭다. 아까까지만 해도 나의 잠자리며 나의 안락한 곰굴이었는데, 이젠 집 없는 떠돌이 곰이 된 기분이다. 로비에 앉아 이후 일정을 고민하며 나름 심각했던 나였다. 한데, 아내는 여유 있게 음료를 시키고 로비 한켠에 앉았다. 주변은 체크아웃과 체크인으로 북적였다. 불안감 섞인 목소리로 아내 통순에게 물었다.
"이보게 통순 군! 우리 이후 일정이 어떻게 되나? 지금 이 시간대 체크아웃은 내 계획에 없었는네...어떻게 해야 하지?"
불안해하는 날 상당히 재미있게, 히죽 웃으며(아우! 기분 나쁘게) 통순이 답을 해줬다.
"거~ 참, 불안한 얼굴이 볼만하구만. 자넨 이 누나만 믿게. 이미 식당 예약도 다 해놨다네. 툭툭이 불러서 점심 먹고, 출국 패키지 숙소로 가서 쉬다가 밤 11시에 공항 가면 된다네. 새벽 2시 비행기니까 걱정 말게"
"오~ 자네가 바로 그 신화 속 영리한 막내 돼지구만. 벽돌집 짓고 늑대를 물리친"
안심이 되자, 마시던 망고빙수가 그렇게 달 수가 없었다. 곧 툭툭이가 도착했고,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점심은 한국인 사장이 운영하는 'KRI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외관부터 남달랐다. 벽도 문도 없는 사방이 트인 공간 위로, 잔나무 가지들이 얽히설켜 천장과 지붕을 대신하고 있었다. 바닥은 진한 갈색의 두꺼운 나무판으로 빽빽이 덮여 있었고, 탁 트인 공간 너머로 짙은 녹음과 연둣빛 식물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우리는 BBQ세트와 단품 요리 그리고 가볍게 맥주를 시켰다. 돼지고기, 닭고기, 소시지, 감자 튀김등 익숙한 메뉴였지만, 작은 정원이 있는 야외에서 먹는 맛은 묘하게 다르게 느껴졌다. 시원한 맥주를 연거푸 들이키며 '한잔 더!'를 외치고 싶었다. 필리핀에서 먹은 음식 중 단연 최고였다.(혹시 이 글을 보고 보홀로 여행을 간다면 이곳을 1순위로 추천합니다.)
식사를 마친 후 출국팩으로 잠시 머물 숙소로 갔다. 이곳도 한인이 운영했는데, 처음에 느꼈던 깔끔한 느낌은 자세히 보니 조금 아니었다. 침대와 샤워장은 다소 낡은 모텔 느낌이었다. 뭐 그래도 잠깐 쉬는 곳이니 크게 개의치 않았다.
잠이 든 것도 깬 것도 아닌 상태에서 5시가 되었다. 아내 통순이 급하게 외출 준비를 시켰다. 필리핀 3일 차 마지막 일정 '노스젠빌라 선셋 뱀부워크 맹그로브 숲'을 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큰 기대 없이 아내말에 이끌려 귀찮은 몸을 일으켰다. 우리를 안내한 이는 나이가 지긋한 남성이었고, 운전은 젊은 여성이 맡았다. 순간 역할이 바뀐 게 아닌가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남성 안내인에게 깊이 감사하게 되었다. 큰 기대 없이 나선 마지막 오후였지만, 나는 살아있다는 것과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꼈다. 그 황홀감은 내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벅찼다.
차로 약 10분쯤 달려 도착한 작은 정원에서 입장권을 사고, 맹그로브 숲으로 들어섰다. 길게 뻗은 대나무 다리를 걸으며 안내인이 '이 다리는 못을 일체 사용하지 않고 만들었다.'라고 이야기 해줬다. 짙은 빽빽한 맹그로브 숲사이로 얇은 듯 깊은 강이 흐르고, 그 위로 다리가 한참 이어졌다. 안내인은 끊임없이 북곰과 통순에게 다정한 연출(?)을 요구하며 사진을 찍어줬다. 매사에 정직한 북곰은 거짓된 연출에 힘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내색하면 죽을 수도 있다.) 쑥과 마늘 먹는 곰인냥 참고 또 참았다.
'맹그로브라길래 뭔가 대단할 줄 알았는데, 딱히 없구만...'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나를 돌아보고,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꼈다.
울창한 맹그로브 나무가 조금씩 잦아들 때쯤 탁 트인 바다가 보였다. 바다는 언제나 보는 이로 하여금 왠지 모를 아련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우리가 물에서 시작된 존재이기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다. 어머니에게 느끼는 그 알 수 없는 향수에, 나는 보이지도 않는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살짝 일렁이는, 기분 좋은 바람이 있는 날이었다. 조금 많이 걸은 북곰은 짭조름하면서 시원한 바닷바람이 얼굴과 등 뒤의 땀을 씻어줬다. 갓 빨래한 옷을 입은 듯 상쾌함이 스며들고 있을 때, 저 멀리 아늑히도 먼 곳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빛을 봤다. 모든 수많은 종교 중에 반드시 태양을 신으로 모시는 종교가 있다. 나는 왜 우리 인류가 태양을 신으로 숭배하는지 이 광경을 보며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바다에서 어머니를 느꼈다면, 태양에게서는 모든 만물의 아버지를 느꼈다. 홀로 이 자리에 있었다면 왈칵! 크게 엎드려 울며 찬양했을지도 모른다. 쏟아질 듯한 눈물을 참으며, 침묵 속에서 태양과 바다와 나를 봤다. 그 속에는 고통, 고민, 두려움도 없었다. 처음으로 온전한 나를 본 순간이다.
'존재했고, 존재하다, 존재합니다.'
조금 더 풀어쓴다면 '당신의 자식인 내가 여기 존재했고, 존재하다가, 언젠가 다시 당신 곁으로 가 존재할 것입니다.'
지금은 육신에 얽매여 갈 수 없지만, 필멸자는 결국 돌아가는 존재다. 그때는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가 보고 싶다.
태양이 바닷속으로 완전히 저물자, 바다에 난 길도 사라졌다. 그때서야 감상의 끝이 찾아왔다. 만약 그 순간 펜과 노트가 있었다면 훌륭한 글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온전히 봐야 할 순간에 거추장스러운 것은 없어야 한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며 그때의 감정이 떠오르지 않아 아쉽다. 그래도 괜찮다. 포기도 어느 정도 있어야 인생이다.
아내 통순에게 이 자리를 빌려 크게 감사한다. 그녀가 있었기에 지금 내가 있다. 참 귀찮고, 같이 있으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또 없으면 살 수없는 것 같다. 참 뫼비우스의 띠다. 3박 5일간의 짧았던 필리핀 보홀 여행은 끝이 났고, 물론 나의 삶에 끝은 멀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곳을 보고, 느끼고, 그리고 기록할까. 조금 욕심을 내본다면 지금처럼, 아니, 지금보다 조금만 더 재미나면 좋겠다.
이상으로 나의 필리핀 보홀 여행을 마친다. 다음엔 어디로 갈까. 또 어떤 새로운 나를 만날까. 벌써부터 흥미진진하다.
나는 표류하는 노쇠한 북곰이니까. 옆에 뚱뚱한 돼지 한 마리쯤 데리고 다니면, 조금 더 재미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