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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 밥밥 Aug 16. 2024

차가운 비눗물 냄새가 나던, 붉게 그을린 남자

아빠가 추락했다.


언니, 아빠가 일 하다가 떨어졌대. 지금 큰 병원에 왔어. 동생의 전화에 다급히 광역버스를 타고 집으로 내려갔다. 언론을 전공하던 대학생이던 나는 어쩔 수 없이 신문 기사를 많이 봤는데, 건설현장 사고 기사를 볼 때마다 심장이 덜컥했다. 육하원칙으로 잘 기술된 기사를 통해 사고가 발생한 지역이 우리 동네가 아님을 알 수 있었는데, 나는 안도했다. 그때마다 종종 자기가 노가다판에서 정말 알아주는 목수라고, 사람들이 자기를 많이 찾는다고 했던 아빠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불안을 잠재웠다. 멍청하고 한심하게도 누군가에게는 비극적인 사고라는 문제의식도 없었다.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꾸준하게도 나를 괴롭혀왔지만, 아빠의 사고는 언론 따위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동생의 목소리로부터 시작된 일은 나를 감정적으로 동요시키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일들을 부여했다. 병원을 찾아갔었고, 병원비가 얼마나 나왔는지 원무과에 물었었고, 보호자로서 아빠의 주민등록번호를 더듬더듬 말했었다. 그날 이후로 내 주민등록번호만큼 능숙하게 아빠의 숫자를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병원 침대에 누워있던 아빠는 낯설었다. 내 머릿속에서 단숨에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와는 차이가 있었다.


아빠에 대한 내가 갖고 있는 직관적인 형상은 보통의 오후 5시 즈음,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는 때 흙먼지투성이를 뒤집어쓴 채로 현관문을 여는 모습이다. 강렬한 태양 빛 아래에서 아빠는 밀리터리 무늬의 긴 바지, 주머니가 많은 조끼, 갈색의 두터운 작업화를 신었고, 얼굴은 해가 떠 있는 내내 한참 구워졌다. 퇴근하자마자 법으로 정해놓은 것처럼 화장실로 직행하여 그 희갈색들의 무언가가 덮인 작업복들을 벗어내고 차가운 물로 더위를 식혔다. 얼굴부터 목 아래까지 붉게 익은 아빠는 냉장고에서 페트병을 꺼내 냉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아빠가 겪었던 무더움이 얼마나 뜨거웠을지 알 수 없는 것이었지만, 다 타버린 아빠의 피부가 안쓰러워 동생과 나는 아빠에게 꼭 선크림을 발라야 한다고 잔소리를 해댔다. 자외선은 피부암의 원인이니 꼭 바르라고 선크림과 보습 로션을 몇 번이나 사서 줬었다. 아빠는 조잘대는 우리의 입을 막기 위해, 차를 태울 때마다 운전석 옆 공간에 있는 선크림을 보여주며 매일 같이 바른다고 습관처럼 얘기했다. 이런 거나 챙겨주는 딸들은 아빠의 유일하고 대단한 자랑거리였는데, 이건 간혹 같이 현장에서 아저씨들의 표정을 통해 얼마나 지독했을지 알 수 있었다. 아저씨들은 우리를 본인들의 딸 마냥 대견하고 사랑스럽게 쳐다보았다. 아빠와 같은 피부색을 했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아저씨들의 얼굴은 부담스럽고 싫기만 했다. 왜 말이나 몇 번 해보지도 않은 아저씨들이 이렇게 친한 척을 했었는지 가늠해 보면, 같이 일하면서 우리 아빠의 차에 올라탄 만큼 우리에 대한 애정이 쌓였을 것이다.


하지만 무색하게도 그 아저씨들의 대한 내 감정은 시간이 갈수록 더 나빠졌다. 건설현장 작업복 차림새와 검붉은 얼굴빛의 모습을 한 그들은 아빠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냄새가 났다. 아저씨들의 냄새는 알코올의 냄새가 주를 이뤘다고 치부했었는데, 아빠에게는 항상 차가운 비눗물 냄새가 같이 어우러졌었다. 단지 비눗물 냄새가 나지 않아서 그들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아저씨는 이빨이 몇 개 없었고, 흰머리가 가득한 긴 머리를 질끈 묶고 다녔다. 누구는 외국인처럼 생겼었는데 가족이 없다고 했고, 아빠를 친형처럼 따랐다. 또 어떤 사람은 아빠처럼 부인이 집을 나갔었는데, 아빠는 그 아저씨네 집에 찾아가 무단 잠수를 탄 아저씨를 억지로 데리고 일터에 나가기도 했다. 이런 요소들보다는 아빠와 같이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싫었다. 간혹 그들과 만나더라도 나는 인사만 하며 겨우 예의는 차렸지만, 그들은 큰 목소리로 나를 반겼다. “이게 누구야 첫째 딸이야~? 아저씨 애기 때 봤는데 기억 안 나지? 공부도 잘한다며 다 컸네. 누가 키운 거야? 잘 컸어!” 흐뭇하게 바라보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리 없는 어린 나는 무안하게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지만 그 아저씨들은 매번 여간했다.


술 좀 그만 마시지 않겠냐고 아빠에게 말할 때마다 그는 그 초록 유리병이 본인에게 불가항력적인 존재인 것처럼 굴었다. 막일 일꾼들은 일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일하는 와중에 술을 한잔씩 해야 한다고 했고, 본인은 사람들을 데리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어떤 저녁 회동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안 그래도 매일 저녁이면 소주 한 병에 반주를 하면서, 그 아저씨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날에는 아빠는 평소보다 더 취해서 집으로 왔다.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것도 아니고, 술에 절여진 아빠보다 아빠와 술자리를 함께하는 그 아저씨들이 나를 더 화나게 했다. 항상 술을 마셔도 샤워를 하고 얌전히 잠자리에 드는 아빠였는데, 인사불성이 되는 날들의 빈도가 점차 짧아졌다. 목수의 자부심은 아빠와 함께 인사불성 되어가는 듯, 일을 잡아놓고 술에 취해 하루종일 잠만 자기도 했단다.


이 사고로 그는 앞니 하나를 잃었다. 자주 보던 흰머리를 질끈 묶은 아저씨가 바로 119에 신고하고 병원에 데려다줘서 다행히 빠르게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아빠는 오랜만에 보는 나를 반가워했지만 나는 그가 마냥 반갑지 않았다. 아빠는 여전히 열기가 가시지 않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더 이상 찬 비눗물 냄새는 나지 않았다. 매번 선크림을 발랐지만 그는 언제나 그의 동료들과 피부색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빠의 얼굴색은 선크림 따위의 것이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사실 우리는 자외선 따위에게 아빠를 지키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거운 노동을 견디는 아빠에게 전달할 수 있었던 겨우 어린 마음이었다. 그 이후로 우리는 이가 약해진 아빠에게 양치질을 잘하라는 잔소리를 추가했다. 이 사고는 향후 10년 동안 지속될 중증 알코올 중독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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