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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 밥밥 Aug 19. 2024

술 사러가는 어린이

아줌마 안녕하세요! 아빠가 소주 한 병 사 오래요. 그땐, 동네 슈퍼에 가서 이렇게 말하면 암암리에 어린이인 내가 술을 살 수 있었다. 슈퍼 아주머니는 검정 비닐 봉다리에 초록색 소주 한 병을 질끈 묶어 담아주셨다. 조심히 들고 가야 해!라는 당부와 함께 혓바닥이 파래지는 막대사탕이나 반짝 거리는 은박 포장 속 줄무늬가 새겨진 초콜릿 같은 작은 뇌물을 주시기도 했다. 나이답지 않게 눈치가 참 빨랐던 나는 그 심부름이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엄청 나쁜 짓이라기보다는 미션을 수행하는 비밀 요원이 되는 것마냥 굴었다. 슈퍼마켓 NPC가 선사하는 달콤함은 간식은 구비되어있지 않은 초라한 집에 사는 콩쥐 요원에게 멋쩍은 보상이었다. 아직까진 단 한 번의 실패 없이 100% 성공률의 모범 요원이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검정 봉다리를 야무지게 들고 슈퍼를 나오던 참이었다. 골목길 코너를 돌자마자 경찰 아저씨 두 명이 보였다. 다시 되돌아가면 바로 슈퍼였고, 앞에는 맞닥뜨리면 안 되는 갑작스러운 장애물 등장! 진퇴양난의 나는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단단히 묶인 봉지를 품 안에 소중히 안았고, 이 안에 뭐가 들었을지 저 아저씨들은 절대 알 수 없다. 나는 그냥 잘 지나가면 된다.


꼬마야, 그 봉투 안에 뭐가 들었니?


경찰 아저씨가 다가와 웃으며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었다. 감정이 얼굴에 잘 드러나서 아마 딱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표정은 숨기지 못했지만 호기롭게도 경찰 아저씨를 뒤로하고 전속력으로 도망갔다. 집까지 한 번도 안 쉬고 도착했는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 와서야 뒤를 돌아볼 수 있었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경찰들은 나를 잡으러 왔었을까? 놀란 마음으로 심부름을 시킨 이에게 경찰을 봤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겨우 뛰어서 집으로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딸내미가 잡혀갈 뻔했다는데, 그는 별 반응이 없었다.


내 인생 최초의 불법 미션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아빠는 두어 번 더 술 심부름을 시켰다. 주저주저하며 경찰을 봤었다는 얘기를 하니, 알았다며 본인 몸을 이끌고 그 검은 봉투를 사 왔다. 한동안은 경찰서에서 나를 다시 잡으러 오는 것은 아닌지 노심초사하며 잠을 설쳤다. 경찰서를 지나가게 되면 두 눈 꾹 감고 빠른 걸음으로 걷기도 했다.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소주병을 감싼 종이에 적혀있는 미성년자는 주류를 구매할 수 없다는 문구를 똑똑히 기억했기 때문이다. 슈퍼 아주머니가 대신 벌을 받은 건 아녔을는지. 며칠 뒤 콩나물을 사러 갔을 때 슈퍼 아주머니는 멀쩡히 있었다. 다만 그전처럼 어떤 부탁은 없었고, 다른 특별함도 없었다. 조금 싸늘한 표정을 느꼈던 것 같아 왠지 주눅 들었었다. 지금 생각해 본다면 미성년자에게 주류 판매를 했다면 며칠간 영업 정지 처분을 받았을 텐데, 괜스레 도둑이 제 발이 저렸던 조바심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 시절, 지금보다 더 관대했을 술에 대한 너그러움 때문에 이었을지도 모른다. 작은 동네에 그 금방 슈퍼는 그곳 하나기에 구두 전달로 좋게 넘어갔을 수 있다. 경찰 아저씨들도 동네 사람들이었으니까 좋게 넘어갔을 수 있겠지. 아빠의 반응처럼 별로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겐 나쁜 사람들 잡으러 다니는 경찰 아저씨가 미성년자가 구매하면 안 되는 맛도 없고 몸에 좋지도 않은 초록병에 대해 추궁했을 때의 두려움이 있었다. 이 기억이 나에게 술에 대한 첫인상 깊은 기억인 이유는 나쁜 일을 시키고서 아무렇지 않아 하는 아빠에게 느꼈던 서움함이었을 것이다. 아빠가 어린 시절에는 더 관대했을 술 문화가 있어서 아무렇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런 문화가 있었음에 경찰 아저씨도 고작 10살 정도 되는 아이의 달리기를 구태여 따라잡지 않았을 것이다. 아빠는 미성년자가 주류를 구매한다고 해도, 판매처에만 처분이 내려지는 사실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 나는 성인이 되기 전 술을 다시 사러 가는 일은 없었다. 술병에 기재되어 있는 강력한 문구와 달리, 우리나라는 술에 대해 너무나도 관대하다. 어린이에게 불법적인 일을 시킨 아빠에게 다신 술을 못 먹게 하는 그런 처사 같은 것이 내려졌어야 했는데, 너무나 원망스럽다. 이 나라에는 술 마시고 범죄를 일으키더라도 음주를 제재하지도 않는다. 음주운전을 했더라도, 절대 술을 못 먹게 한다면 다시 주취 중 운전대를 잡는 일은 없을 텐데 말이다. 면허증 같은 거 뺏어도 취하면 도덕성이 결여되는데, 다른 범죄는 못 저지를까? 말도 안 되는 너그러운 한국의 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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