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랑한 밥밥 Aug 21. 2024

비의 문제

투둑투둑, 비가 오면 한층 거세진 중력이 나를 자꾸만 눕힌다. 나는 쉬이 저항할 수 없다. 그렇지 않은 날보다 어쩔 수 없이 잠을 오래 자게 된다. 일어나려는 의지가 있어도 비라는 자연의 대섭리 앞에서 무기력해진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이 왜 이리 나에게만 크게 작용하는지 알 수 없다.


비가 내리면 현관문이 다시 열렸다. 해가 뜨기도 전 4-5시 누구보다 이른 아침에 일터로 향한 아빠가 돌아온 것이다. 노가다 일이라는 것은 오로지 해가 떠 있어야지만 진행된다. 아빠가 나그네였다면 해와 바람의 싸움에서 그 누구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비가 내려야지만 아빠의 작업복은 벗겨졌다. 해와 바람은 내기에서 이기지 못해 허무했을 텐데, 비는 기뻤을까? 괜한 싸움에 휘말린 나그네만 불쌍하다. 그 나그네에는 옷이 벗겨졌어도 자기 자식을 먹일 달달한 구운 빵을 사 왔다. 자글자글한 은박지에 포장마차 토스트가 둘러싸여 있고, 검정 봉다리는 바스락 거렸다.


“아침을 먹고 다녀야지.”


말은 숨과 함께 새어 나왔다. 그 공기는 동생과 내가 아침을 먹고 다니지 않아서 나오는 안쓰러움이었을까. 우리는 비가 오지 않으면 아침은 먹지 않았다. 난 아침을 먹지 않아서 서러웠던 적은 없다. 아빠는 항상 이상한 부분에서 걱정을 했다. 그런 아빠의 말소리에 비몽사몽 하며 우린 왜 여기에 있냐고 물었다. 비가 온다고 했고, 비 와서 학교 가는 게 힘들 테니 차로 데려다준다고 했다. 아빠가 돌아와 있으면 언젠가부터 자연스레 비가 오는구나 생각했다. 별다른 질문은 건네지 않아도, 아빠는 비 때문에 힘들 테니 데려다준다며 또 다른 숨을 뱉어냈다.


두 자매의 등교 준비를 너그럽게 기다려줄 아빠는 별로 없다. 아빠 역시 성격이 급했고, 아빠의 보챔에 토스트 봉지와 허름한 우산을 겨우 들고 차에 올라탔다. 집에 있는 우산이 정말 싫었다. 어디서 받아온 버버리 체크무늬를 따라한 중우산, 구멍이 나거나 우산대가 부러진 우산 같은 거밖에 없었다. 반 애들이 들고 다니는 평범하거나 예쁜 우산을 쓰고 싶었다. 차창의 와이퍼가 아무리 때려도 다시 생기는 비를 보며, 저거 오지 않았으면 했다.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불만을 품은 채로 오물오물 토스트를 먹었다. 마가린으로 바싹 구웠을 식빵이 과일향이 나는 케첩, 마요네즈로 푹 젖었고, 아삭한 양배추 채 섞인 계란과 햄 한 장이 잘 어우러졌다. 잊지 못하도록 맛있었다. 그런 우리를 보며 아빠는 트럭이 아니라 봉고차로 데려다 주니 훨씬 좋을 거라고 말했다. 옆 반에 부자라고 소문난 애도 트럭 타고 다녀서 괜찮다고 말대답을 했다. 면, 리에 사는 애들이 다니는 학교라 생각보다 트럭은 흔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대꾸는 하면서 트럭보다 우산이 창피하단 말을 못 했다.


토스트 다 먹고 은박지를 꾸겨댈 쯤이면 학교에 도착했다. 교문 저 멀리에 차를 대고 다녀오겠다고 했다. 헬리콥터 부모가 극성이라 교문 안까지 차를 가져오지 말라는 가정통신문이 주기적으로 왔기 때문이다. 아빠에게 인쇄물을 보여주기까지 했는데, 금방 까먹고 오해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학교에 도착하고 나면 나는 아침 자습 시간이 끝내고 화장실을 갔다. 배가 아팠는데, 아침에 빵을 먹어서였다. 이건 성인이 된 이후에 깨달은 사실이었다. 아빠는 학교에 데려다주는 일은 있어도 데리러 오는 일은 없었다. 하교 후 집으로 돌아가면 켜진 텔레비전 아래에 일당을 벌지 못한 나그네와 빈 소주병이 있었다. 그나마 살 만한 봄과 가을은 점점 짧아지는데, 노가다 목수가 살만한 날은 얼마나 될까. 아빠와 나는 서로를 너무 몰랐다.



이전 03화 술 사러가는 어린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