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어쩔 수 없는 보호자 안내 사항을 안내하던 의사 선생님께 감사했다.
와중에 동생은 고등학교 졸업을 했다. 물론 아빠와 나는 가지 못했고, 고모네 식구와 할머니가 대신 참석했다. 아빠는 먼 곳을 응시하며 동생에게 미안해했다. 아빠는 갓난아기 시절 생모와 헤어진 매번 동생을 불쌍해 여기는 그 눈빛을 했다. 내가 동생과 싸울 때면 아빠는 항상 걔는 엄마가 없었잖아라며 나의 입을 막아버렸다. 동생이랑 나랑 연년생인데, 말도 안 되게 치사한 전략이다. 동생은 아주 착한 아빠가 있어서 좋기도 하겠다.
바로 바꾸는 말이지만 당연히 하나도 부럽지 않다. 취하지 않은 아빠는 고약한 착한 거짓말쟁이라서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기 때문이다. 말 주변도 없으면서 딸들이랑 실없는 농담이나 싶어 하고, 금주를 맹세하고는 왈칵 또 술을 들이붓는다. 알코올 중독자들이 세상에 너무 많기 때문에 기네스 기록에 거짓말 부문은 없을 것 같다. 그는 몸이 어느 정도 살만해지자 병원 담당 선생님들께 퇴원을 요구했다. 입원실이 답답해서 어떻게 있냐고 투정을 해댔다. 어느 정도 몸이 살만해지니, 병원비가 걱정되는 마음에 또 거짓말을 했다. 병원에서도 진상 환자인 그를 최대한 빨리 퇴원시켜 줬다. 그 돈은 결국 할머니와 같이 사는 고모가 덤터기를 썼다.
담당의는 꼭 알코올 중독을 치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빠는 이제 금주를 하겠다고 또다시 말했다. 이번은 절대로 지킬 것이라고 넉살을 부렸다. 병원에서 방금 퇴원해서 근래 중 떼깔이 가장 좋은 양치기의 얼굴을 보고도, 아빠의 가족들은 그 말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 모두의 예상대로 얼마 안 가 다시 음주를 했고, 할머니의 6남매 중 몇과 나는 대책 회의를 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담당의나 인터넷이나 모두 입원을 권했기 때문에 결론도 그렇게 내렸다.
폐쇄정신병동 강제 입원이었다. 아빠보다 덩치가 큰 작은 아빠가 동행했다. 아무리 목수일을 했어도 건강이 좋지 않은 그는 동생을 이길 수 없었다. 술 한잔 걸친 아빠를 속여 병원에 입원시켰다. 할머니 어떻게 정신병원에 자신의 아들을 입원시키냐고 원망했고, 작은 아빠도 너희가 한 선택이니 너희가 책임지라 했다. 정신병원에 대한 인식이 동생과 나를 괴롭혔다. 할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아빠를 위하는 현명한 방법이라 생각한 나는 이를 악 물었다.
강제 입원의 유효기간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3개월이었다. 더 입원시킬 수 없냐고 해도, 환자 인권 때문에 안된다고 했다. 환자 가족의 인권을 위한 법을 발의하는 정치인은 본 적도 없다. 어쩔 수 없이 아빠의 음주를 막기 위해 동생, 나, 할머니는 차례대로 그리 애를 썼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그를 아무리 돌봐도 자꾸만 술을 마셨다. 그리도 다시 또 쓰러지면 아빠의 또 다른 형제가 와서 그의 입원을 도왔다. 현행법 상 2촌 이내의 혈족만 강제입원의 동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아빠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10년은 입원과 퇴원, 쓰러짐의 반복이었다. 병원에 가면 얼굴이 좋아져서 나오는 아빠를 보고서 할머니도 병원에 대한 인식이 점차 바뀌었다.
아빠는 왜 그리 술을 마셨을까. 인터넷 천지 온 세상을 다 뒤져봤을 때, 아빠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 원인 중 하나는 유전적 기질이었다. 아빠와 영락없이 판박이처럼 닮은 할아버지도 술 때문에 떠나셨기 때문이다. 윗 대에 알코올 중독 때문에 떠난 가족이 있다면, 그 후손도 중독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혼과 재혼, 또다시 실패, 싱글 대디와 같은 상황 속에서 아빠는 술에 의존하기를 선택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희생으로, 아빠보다 10살은 더 많은 나이로 떠나셨다.
결국 떠나버린 아빠의 장례식에서 아빠의 형제들은 상주인 내 옆에서 하나같이 똑같은 에피소드를 얘기했다.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데 한 빈소에 어린 자매 둘이 장례를 치렀다고, 근데 그곳이 너무 썰렁해서 그리 슬펐다고 했다. 그 이후로 모두가 그 자매에 동생과 나를 대입했다고 했다. 20년도 더 된 얘기를 그날 처음 들었다. 같은 얘기도 5번, 잔소리랑 걱정도 5배, 도움도 5배다. 난 이 케케묵은 스토리가 당신 자식들 마음에 부린 할아버지의 걱정의 마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들 말도 걱정이 많았나 싶었다. 어쩌면 그 모진 말은 할아버지를 보내면서 본인들에게 한 자책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빠의 형제와 잘 자란 자매가 힘쓴 덕분에 아빠는 할아버지의 걱정보다 아빠는 20년도 더 살고 갔다. 장례식 손님이 예상보다 많이 와서 음식을 2배는 더 시켰다. 어른들이 있었어서 빈소를 지키는 와중에 돌아가면서 동생과 나는 잠에 들기도 했다. 슬픔과 걱정, 안쓰러움이 가득했던 빈소였다.
어느 날은 꿈을 꿨는데, 거실에 아빠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의도치 않게 쓰레기통을 열었는데, 담배꽁초가 가득했다. 담배 애호가였던 할아버지와 아빠가 보고 갔나 싶었다. 아빠는 하늘에 가서 할아버지와 형동생 먹자고 장난을 쳤을지도 모르겠다. 영락없이 닮은 부자가 회포를 풀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