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에서 처음 맞은 삼바축제는 이치라빠나(Itirapina)에서 열린 삼바축제였다. 이치라빠나는 브라질에서 태어난 사촌동생 씨꼬(Tico)와 마네(Mane)의 브라질친구인 하바덩(Habadao)의 고향이자 별장이 있는 상파울루에서 3시간 떨어진 작은 도시였다. 브라질의 삼바축제는 브라질어로 까나발(Carnaval)이라고 한다. 우리가 TV에서 보는 것은 리오에서 열리는 삼바스쿨들의 삼바대회를 보는 것이고, 실제 브라질인들이 하는 축제는 좀 다르다. 2월 중에 열리는 축제는 지방마다 좀 다르지만,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두 달 동안 열린다.
국가에서 정해진 공휴일은 일주일 정도이며, 공공장소는 물론 놀고, 먹는 곳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문을 닫는다. 부자들은 비싼 클럽에서 돈이 없는 이들은 자기 마을에서 주최하는 작은 퍼레이드에 참가하며 각자 형편에 맞게 축제를 즐긴다. 미까레따(Micareta)라는 대형트럭을 개조해 만든 움직이는 밴드가 천천히 거리를 지나가면 시민들은 트럭을 따라다니며 삼바 리듬에 맞추어 술을 마시며 춤추며 논다. 입장료도 필요 없고, 그냥 트럭을 따라다니면 되는 것이다. 거리에서 에이즈 예방과 가족계획을 위해 콘돔을 무상으로 나누어 주는 광경은 이색적이었다. 날씨도 덥고 해서 남자는 웃통을 벗고 여자는 비키니 상의에 핫팬티를 입는 것은 보통이다. 길거리에는 키스하는 젊은이들도 흔히 볼 수 있으며, 국민 모두가 광란의 밤을 지내기 위해 삼바를 즐긴다.
오후 늦게 바비큐 파티를 시작하며 삼삼오오 축제 현장으로 모여든다. 고기와 맥주를 실컷 먹고 배부르면 한숨 자고 또 구워 먹는데, 보통 3-4시간은 이야기하고 음악을 즐기고 춤추며 저녁을 맞이한다. 어느 정도 술이 오르면 모두 길거리로 나가 퍼레이드에 참가하거나 구경하다가 밤 11시 정도 되면 동네 클럽에 들어가 밤새도록 춤을 춘다. 날씨가 밝아야 귀가해서 자고 오후 1시가 지나서 일어나 다시 술 마시며 다음날 파티를 시작한다. 이런 파티 문화가 일주일 간 지속된다.
2-3일 정도는 신나게 술을 마시고 놀지만, 4-5일이 지나면 너무 많이 마셔서 더 이상 술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럴 때 먹는 술이 브라질에서 가장 유명한 까이삐링 야(Caipirainha)이다. 브라질 고유의 럼주인 삥가 (Pinga)에 싱싱한 라임과 설탕에 얼음을 넣은 칵테일이다. 아마존에서 나는 과나라(Guarana)를 혼합시키기도 한다. 51도의 독주에 시큼한 라임즙과 달달한 설탕을 넣어 만든 이 술은 열대지방 특유의 맛이다. 51도라는 핑가 브랜드는 1위 럼주를 이어 당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팔리는 술이라고 한다.
이 까이피링야는 브라질 소고기 바비큐에도 잘 어울린다. 브라질은 세계 최대 소 생산국의 하나인데, 소 값이 싸서 소고기 스테이크는 브라질인의 주식이다. 세계를 다녀보고 다양한 음식문화를 접해 보아도 브라질 사람들처럼 소고기를 맛있게 즐기는 사람들은 드물 것이다. 고기를 자르는 컷(Cut) 또한 다양하여 여러 부위를 음미하며 고기를 즐길 수 있다. 주로 서양에서는 안심, 등심, 뉴욕스테이크, 치맛살, 부챗살 등 먹는 부위가 한정되어 있는 반면 브라질 소고기는 더욱더 세분화되어 있고 미식가의 입맛에 맞게 자른다.
예를 들어 한국에 보섭살에 해당하는 삐깡랴(Picanha)란 부위는 소다리의 옆 부분에서 팔뚝만 한 크기로 두 조각 정도밖에 나오지 않아 보통 등심보다 다섯 배 이상 비싸다. 그 맛 또한 요리를 잘할 줄 알면 최고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보섭살이 등심보다 훨씬 싸다. 부드러우면 맛있다고 생각하나 보다. 브라질 소는 목에 큰 혹이 나 있는데 꾸삥(Cupim)이라고 하는 이 혹 부위는 기름지고 부드러우며 참 맛있다. 당시 소 한 마리에 400불 정도여서 소고기로 만든 음식은 아주 흔한데, 브라질 사람은 고기를 즐긴다. 브라질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축구, 해변, 삼바, 소고기 그리고 아름다운 여자’를 꼽을 수 있다.
이치로삐나는 인구 3천 명 정도인 마을로 사람들이 대부분 서로 알고 지내는 전원마을이다. 마을사람 대부분 농사를 하거나 가축농장을 경영한다. 친구 하바덩의 아버지는 이곳 출신인데 상파울루에 엔지니어 일로 이사를 왔다. 하바덩 아버지는 이곳 이치라빠나 에 수영장이 딸려 있는 별장이 있어서 하바덩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하바덩 친구인 우리 총 열 명 가까이 이곳에서 지내며 카니발을 보내기로 했다.
하바덩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동네 옛 친구들이 찾아왔다. 그중 덩치가 큰 한 명이 나한테로 다가와서 “헤이 꼬레아노!(Coreano) 브라질 사람들은 술도 잘 먹고 잘 노는데 넌 잘하는 게 뭐니?”하고 물었다. 그래서 나도 “술 잘 먹고 잘 논다” 했더니 “허허 그럼 잘됐네. 술 시합 한번 해볼까? 난 이 동네에서 술을 제일 잘 마신다고 내 별명은 술 하마야. 하하!” 나는 말도 잘 안 통하고 그들의 문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나에게 술 먹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술 먹는 건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좋아, 그럼 해보지 뭐”하고 승낙했다.
주위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너 한 병, 나 한 병’ 술을 먹을 때마다 주위에 모인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들렸다. 난 지지 않으려고 고함을 지르면서 한 병 또 한 병 들이켰다. 우리는 큰 테이블에서 술을 마셨으며 술을 거부하거나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지는 것으로 했다. 한 병 두 병 마시다가 열일곱 병째 나의 라이벌이 그 자리에서 술 마시다가 옆으로 골아떨어졌다. 나의 승리였다. 모두가 “구스타보! 구스타보, Coreano, Coreano!”를 외치면서 나를 응원해 주었다. 나는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가르쳐 준 술 솜씨로 이길 수 있었지만, 태어나서 최고로 술에 많이 취했다.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술이 취해서 샤워장에 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수영장에서 다이빙을 했다고 한다.
술이 깬 뒤 다음날부터 우리는 본격적으로 카니발을 즐기기로 했다. 오후에는 동네 광장에서 친구들과 만나 얘기하고 저녁에는 마을에서 주최하는 퍼레이드에 참가했다. 각자가 원하는 복장을 입고 동네 사람들과 북을 치고 삼바를 추는 것이다. 퍼레이드가 끝나고 우리는 동네클럽에 들어갔다. 클럽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가 삼바축제를 즐긴다. 브라질 특유의 술인 핑가(Pinga)를 마시면 금방 취기가 올라온다. 핑가에 레몬이나 각종 열대과일을 타면 까이삐링랴(Caipirinha)라는 자연산 칵테일이 된다.
삼바음악은 브라질 특유의 북소리에서 흥이 난다. 클럽 안에는 연인들끼리 온 이들도 있고 가족과 함께 온 사람들도 있었다. 삼바축제 두 번째 날이었다. 클럽에서 춤을 추고 잠시 거리로 바람을 쐬러 나왔는데, 늘씬한 금발의 미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초록색 눈을 가진 아주 미인 중에 미인이었다. 나는 단숨에 반했다. 동네 친구인 미구엘에게 저 아이가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하하! 쟤는 이 동네에서 소 사천 마리소유주 농장의 부잣집 딸로서 한 번도 연애를 안 해 본 정말 콧대가 센 로이라(LOIRA, 금발)야.” 금빛 머리가 아름다워 별명이 금발이었다.
솔직히 나는 좀 두려웠지만 만두 팔던 생각을 하며 용기를 내었다. 시장바닥에서 모르는 사람들에게 만두도 팔았는데, ‘이 정도쯤이야’ 하면서 잘하지도 못하는 포르투갈어로 말을 걸며 관심을 보였다.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브라질에서는 우선 관심이 있으면 먼저 눈을 쳐다보는 것이 첫 번째로 하는 일인데, 로이라가 나를 쳐다본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다가갔다. 로이라는 열여섯 살이었고, 나는 열아홉 살이었다. 로이라는 처음 본 동양인인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내가 말하는 서툰 포르투갈어를 이국적으로 생각하고 재밌어한 것 같다.
첫날은 그냥 볼에 뽀뽀만 하고 헤어지고 나는 다음날 정식으로 데이트 신청을 해서 승낙을 얻어냈다. 정말이지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주위 친구들도 나를 믿지 않았다. 이치리 삐나 최대의 미인을 말도 잘 못하는 내가 얻다니! 다음날 오후 나는 옷을 빼 입고 로이라 집 앞으로 그녀를 데리러 갔다. 로이라는 흰색드레스를 입었고, 어머니가 마중 나오며 나에게 인사를 했다. 이는 자신의 딸에게 처음으로 정식 데이트를 신청한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브라질의 전통이다. 로이라의 어머니는 나를 보고는 멋진 데이트 하라고 로이라를 나에게 보내 주었다. 나는 로이라 아버지에게도 인사하고 로이라와 함께 삼바 세 번째 날을 즐겼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퍼레이드를 즐겼고, 클럽에서 삼바도 추었다. 로이라가 나에게 삼바를 가르쳐 주었는데 삼바 춤은 보기에는 쉬운 것 같지만, 리듬을 타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로이라와 함께 살롱에서 춤을 추니 동네 온갖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서양남자들이 동양여자들을 좋아하는 반면 브라질은 반대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브라질 여자가 동양남자와 다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동양 남자들은 주로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인데 대부분이 경제적으로도 부유하고 학교에서 공부도 잘해 브라질 여자들이 동양인들을 좋아한다.
로이라는 다음날 오후에 자기 농장에 놀러 오라고 나와 내 친구들을 초대했다. 수영장이 있는 초대형 농장에는 로이라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소를 거의 “한 마리” 잡아 바비큐를 해주었다. 이곳에서 반가운 손님이 오면 고기를 대접하는 휴하스코(Churasco) 파티는 하는데, 로이라 아버지는 자기 딸의 첫 남자친구에게 소 한 마리를 잡아 준 것이다. 소 4천 마리 중 한 마리다!. 나는 너무 고맙고 즐거웠다.
로이라는 나에게 말 타는 법도 가르쳐 주었고, 버펄로 등에 타고 사진도 찍어 주었다. 개인농장에는 아름다운 연못이 있어 낚시도 마음껏 했다. 태어나서 고기를 그렇게 쉽게 많이 잡은 적도 없을 것이다. 영화에서 본 것들이 나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들이 참 신기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 만해도 아버지 병간호 때문에 바깥세상 구경도 못했는데, 나는 공주의 성에 초대받은 기분이었다. 아름답고 풍부한 자연과 세계의 미녀들이 사는 브라질에서 예쁜 여자친구와 최고의 축제를 마음껏 줄기 다니 꿈만 같았다. 그날 이후로 내 친구들은 나에게 ‘4000 cabeca de boi’(소 사천 수를 꼬신 제비)라는 재미있는 별명을 지어 주었고, 내가 어디를 가든지 화젯거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