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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Aug 14. 2022

조흥은행 이혼녀. 2

박테리아 인간


담배연기 자욱한 약속 다방 구석진 자리 그녀가 앉아있다. 왠지 삼류 음악다방엔 어울리지 않는 손님처럼 겉돌았다.

청바지에 하얀 블라우스의 그녀가 자기소개를 했지만, 이 여자 신상에 관해선 쌀집 아저씨가 말해 주었기에 별로 궁금한 것은 없었다. 김수연이라는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제가 여자인 것도, 이혼녀인 것도, 나이가 두 살 많은 것에도 관심 없으면 저에 대해서 관심 있는 게 있기는 한가요?"

냉소적이었다.

"저는 그쪽이 인간이라는 것에 관심 있습니다."

"자신이 희귀한 생물체라고 생각하세요?"

"박테리아에 가깝죠."

대화가 임종을 앞둔 환자의 숨결처럼 끊길 듯 이어지고 있었다.

여자인 것에 관심 없다고 했으니 누나보다는 김형이라 부르기로 했고, 그녀는 나를 이 선생

이라고 불렀다.

존댓말까지 생략하기로 하자 분위기는 오래된 친구처럼 부드러워졌다.

"어이 이 선생 내가 일 년 만에 음악다방 온 것 같은데 신청곡 하나쯤은 듣고 나가야지."

F.R David ㅡ Music

감미로운 미성의 가수가 시 낭송하듯 감성을 간지럽였다.

밖에는 가을비가 청승맞게 내리고 있었다.

버스정류장 토큰 파는 조그만 가게에서, 대나무로 만든 일회용 비닐우산  두 개를 사서 나누어 쓰고 학사주점으로 향했다.

한문으로 된 벽지엔 낙서들이 가득했고, 탁자 위로 갓을 쓴 백열등 하나가 흔들거리며 졸고 있었다.

작은 항아리에 작은 표주박이 동동 떠있는 동동주와 해물파전을 시켰다.

김수연의 주량은 의외로 셌다. 쌀집 아저씨와 대작을 해도 아저씨가 먼저 취한다고 했다.

"난 오 년 후엔 네팔로 갈 거야."

우연히 네팔 여행을 갔다가 영혼 반쪽을 그곳에 내려놓고 왔기에 꼭 네팔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김수연은 생각보다 강하고 똑똑한 여자였다.

이런 여자가 어쩌다 사기꾼과 결혼해 뒤통수를 맞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하긴 사기 치겠다 작정하고 달려드는 놈을 막을 수는 없었겠지.

"이 선생 너도 가고 싶으면 말해 내가 데려갈게."

요즘 네팔 가서 살 동지들 모집 중인데  현재까지 두 명이 뜻을 같이했다고 한다.

동동주도 거의 비워지고 있었다.

비 그친 거리엔 은행잎들이 바닥에 달라붙어 미끈거렸다.

"어! 미스김 여기서 보네."

한 남자가 다가와 아는 척을 했다.

"이쪽은 회사 동료 이쪽은 내 남자 친구예요."

김수연이 소개를 했다.

남자는 가벼운 묵례를 하고 당황한 듯 돌아섰다.

"여자 혼자 자취하니까 주위에 저런 파리들이 많이 꼬이네. 아주 환장을 하고 껄떡거려. 

남자 친구라고 했으니까 이제 귀찮게 안 하겠지.

이 선생은  여자가 아닌 인간으로 연을 맺었으니까 너는 내가 믿는다."

김수연의 자취방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쌀집 아저씨가 김형 항상 웃게 해달라고 부탁하던데, 아저씨가 많이 힘들어해."

"요즘 들어 아저씨가 내 눈을 못 쳐다봐. 따지고 보면 아저씨 잘못도 아닌데, 내가 그 새끼한테 미쳐서 이성을 잃었었나 봐."

한숨 속에서 동동주 향기가 났다.

바람이 불고 김수연 얼굴만 한 플라타너스 마른 잎이 고여있는 빗물에 떨어져 작은 파문이 일었다.

"김형 가을인데  좀 껴주면 안 돼?"

남자랑 늦은 밤 걷는 게 일 년 만이라며 어색한  팔짱을 꼈다.

"언제 화실로 놀러 와. 소개해 줄 사람도 있고 네팔 갈 사람 서너 명은 있을걸."

옥탑 화실에 출입하는 인간들의 면면을 보면 하고 있는 일들이 다양했다.

화가, 소설가, 연극배우, 고등학교 선생, 음악다방 DJ, 행사 전문 트로트 가수 직업은 다양했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이들 모두가 비주류였다.

직업 앞에 삼류라는 수식어는 꼭 붙여야 어울리는 인물들이었다.

돈 버는 재주는 없고 세상의 중심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한 채, 변방에 있는 자기만의 성을 가지고 있는 성주들이었다.

"이 선생 여자 자취방 보고 싶지 않아?"

노란 가로등 불빛을 받은 대문 옆으로 말라버린 담쟁이덩굴이 실핏줄처럼 담벼락을 감싸고 있었다.

"김형 지금 나 유혹하는 거야? 너무 티 나잖아."

"야! 인간이 인간 유혹해서 뭐 하게, 이 선생 너한테는 우리 집 개방했다. 다음부턴 놀러 와도 돼 아저씨가 이번엔 사람 소개 제대로 했네.

너는 정말 인간 같다. 박테리아 인간."

화실로 오는 길. 은행잎과 함께 비가 내린다.

'대나무 일회용 비닐우산' 가끔은 인연이란 것도 비닐우산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찢어지면 쓰레기통에 거꾸로 처박아버려도 아깝거나 후회되지 않는, 티슈 한 장처럼 가벼운 일회용 인연. 그러나 지금껏 내가 맺은 인연들은 질기고 슬픈 것이어서 함부로 버리거나 연이 끊어질 경우 무거운 죄책감으로 남기 일쑤였다.

이천 쌀 상회, 페인트 벗겨진 정든 간판.

오늘도 쌀집 아저씨는 연쇄점 주인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눈에 띄면 귀찮을까 돌아서 갔다.

불 꺼진 화실. 문득 뒤돌아보면 맨드라미는 벌써 죽어서 화분의 거름이 돼있었고, 반쯤 죽은 해바라기 소피아 로렌만이 가을 끝에 매달려 마지막 인사를 했다.

시린 가슴, 늑골 사이로 휘파람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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