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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Aug 21. 2022

조흥은행 이혼녀. 3

국어선생 최필영


조흥은행 이혼녀 김수연은 일요일마다 화실로 놀러 와서 네팔에 같이 갈 사람들을 물색 중이었다.

그중에서도 고등학교 국어선생 최필영이 큰 관심을 보였다. 네팔에서 말도 안 통하는데 뭘 해 먹고살 것인가, 심도 있는 질문을 하면 그때마다 김수연은 명쾌하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해  주었다.

최필영은 지방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어쩌다 보니 고등학교 선생이 돼있었는데, 선생질하는 것도 쉽지 않은가 보다.

신문사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은 했지만 출판사들은  최필영이 쓴 수필이나 소설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원고지 몇 장 읽어보고는 잘 팔리지 않는 글이란 이유를 달아서 돌려보냈다.

신선들이 모여사는 마을을 소재로 한 장편 소설인데, 최필영의 세계관이 그대로 담겨있는 이슬처럼 깨끗한 소설이었다.

교직 생활도 현실과는 괴리가 있어서, 학생들의 머리에 링거를 꽂아놓고 정답만 주입하는, 잔인한 교육방식에 환멸과 불만을 갖고 있었.

이런 봄날  공부하는 것은 진달래꽃에 대한 매너가 아니라며 아이들을 끌고 뒷산에 피어있는 진달래를 보러 갔고, 가을비 오는 날이면 아이들과 책을 덮은 채 빗소리를 감상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1학년 아이들 국어 성적 올리는 것엔 관심 없는 듯 보였기에, 교장이나 동료 교사들 사이에선 능력 없는 교육자로 왕따 당하고 있었다.

학생이 학교 가기 싫단 말은 많이 들어 봤지만 선생이 학교 가기 싫단 말은 어이가 없었다.

김수연은 그런 최필영에게 깊은 호감과 연민을 느끼는듯했다.

부처님 법문 같은 최필영의 얘기를 듣다 보면

자신의 전두엽에 남아있던 더럽고 구역질 나는 기억들이, 순백색으로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노총각 선생님 저와 데이트하실래요?"

"일없수다 'NO' 총각이면 내가 총각이 아니란 말인데 나 이래 봬도 순진합니다.

이 나이 먹도록 여자랑 딱 한 번 자봤어요. 그것도 고등학교 때  매춘부랑. 친구와 나는 첫 경험이 같은 여자야."

원색적인 농담에도 김수연은 허리가 뒤로 젖혀지며 웃었다.

"나는 존재감, 자존감, 자신감보다 강한 감을 가지고 있지, 뭐냐 하면 다른 감들 하곤 출신 성분조차 이질적인 열등감 하하하."

"호호호."

"김형!  필영이 형 농담이 재밌냐? 유치하구만."

"냅둬 우린 이렇게 웃다 죽을 거야. 호호호."

그렇지 않아도 요즘 최필영은 전국에 있는 시골 복덕방을 찾아다니고 있던 터였다.

작은 산 하나를 사서 두문동처럼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책 속을 기어 다니는 좀벌레 처럼 살다가 책 속에 갇혀 죽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했다.

그러던 차에 김수연을 운명처럼 만난 것이다.

아카시아 피는 5월의 어느 봄날 밤, 최필영은 김수연의 자취방에서 하룻밤에 만 리나 되는 길고 긴 성을 쌓고 네팔에 가기로 의기투합했다고 한다.

이주하면 돈 잘 쓰는 호구 관광객을 상대로 관광 가이드를 해볼 생각인 것 같다.

"이 선생! 아저씨가 쌀집에 한번 들르래, 국어선생 소개해 준 거 고맙다고 술 한잔 산데, 언제 같이 가자."

"고맙긴 뭘 박테리아가 미생물 하나 연결시켜 준 것밖에 없는데."

"이 선생이 박테리아고 필영 씨가 미생물이면 나는 뭐야?"

"김형은 고등동물!"

김수연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네팔 가서 살면 놀러 올 거지?  필영 씨하고 항상 기다릴게."

김수연의 눈동자에 뜻 모를 눈물이 반짝거렸다.


두 사람이 네팔 답사 갔다 온 지 두 해가 지났고, 네팔에서 살집도 마련해놓았다. 작은 교회 예배당에서 휠체어 탄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도 올렸다.

오늘  김수연, 최필영, 쌀집 아저씨와 함께 옥탑 화실 평상에서 마지막 술을 마셨다.

해바라기 소피아 로렌과, 채송화도 떠나는 그들이 아쉬워 달빛 아래 꽃잎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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