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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Apr 25. 2023

잔치



눈이 오면 포근하다는 말 명백한 거짓말이다.


함박눈이 내려도 수은주는 며칠째 밑으로만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우라질 옥탑 화실 연탄난로의 뚱뚱한 몸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야전잠바를 아무리 껴입어도 손이 시려 붓을 제대로 잡을 수 없다. 12월, 한 장 남은 달력에 그녀가 표시해 놓았던 빨간 동그라미. 생일을 기억해 주던 그대는 멀리 가서 기별도 없는데

혹시 오늘은 그대 올까 창문을 열면 마녀의  

손톱같이 날카로운 바람...뼛속을 할퀸다.


문득 미역국이라도 끓여야겠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생일인데 미역국은 먹어야 덜 억울하겠지. 역전시장에서 잘게 썬 소고기 반 근과 미역 한 봉지를 샀다. 정육점 아줌마가 알려 준 대로 소고기를 참기름에 살살 볶아주었다.

냄새는 정말 환상적이다. 미역국은 처음 끓여보는데 요리에 천부적인 재주를 갖고 태어난 것 같다. 진로를 바꿔야 하나 요리사로.



축하객들


나는 몰랐다.

마른미역을 물에 담가 놓으면 어느 정도 불어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양이 많아질 줄이야.

세숫대야에 담가놓은 미역을 건지고 또 건져도 끝없이 올라왔다. 딸려 올라오는 미역을 가위로 잘게 잘랐다. 너무 오래 담가놓았는지 손가락 사이로 줄줄 빠져나가기까지 한다. 

한 냄비로 생각했던 미역이 한솥이 돼버렸다.

미역 포장지 뒷면의 설명서 7~8인분. 망했다.

이 많은 양의 국을 끓이려면 커다란 솥이 필요했지만, 솥은 없고 옥상에서 덜그럭 거리던 스텐 양동이가 보였다. 대충 씻어서 볶아놓은 소고기와 미원 한 스푼 넣고 푹 끓였다. 

끓는 물에 미역이 풀어져서 걸쭉해졌다. 미역국이라기보다는 미역만 넣은 순수한 미역 수프에 가까웠다.

뭔가 부족한 것 같아 술안주 하려고 사다 놓은 북어를 통째로 넣고 미원도 한 스푼 더 추가해서 또 푹 끓였다.

조미료를 많이 넣어서 인지 맛은 기가 막혔다.

양도 점점 더 많아져서 한 양동이다.

이 정도면 일주일은 토 나올 때까지 먹고도 남겠다.

만든 수고를 생각하면 버릴 수도 없고, 하는 수없이 당구장 죽돌이 민석에게 삐삐를 쳤다.

민석이 케이크를 사들고 다섯 놈을 끌고 들어왔다.

"이런 환쟁이 새끼 미리 알려주지. 연락되는 애들 데리고 왔다."

어깨에 눈을 털며 떠들어 댔다.

여섯 명이면 미역국 한 양동이는 처리할 수 있겠지.

"너네 먹으라고 미역국 많이 끓여놨다. 밥은 없으니까 북어 건져서 먹어. 이거 다 먹기 전엔 못 나간다."

양동이를 가운데 놓았다.

"뭐가 이렇게 많아. 생일이 아니라, 너 언제 애 낳았냐? 딸이야 아들이야."

"야! 이 자식 요리 잘하네 숟가락이 필요 없어요. 씹히는 게 없어서 훌훌 마시면 된다, 이거 정체가 미역국 맞지? 우리 엄만 이렇게 못 끓여."

투덜거리긴 했지만 추운 날 따끈한 미역국이 그리 싫지는 않은가 보다. 내 생각일까?

"짜식들 아주 환장들하고 들이마시는구만 많으니까 천천히 먹어라 싸우지들 말고, 케이크도 국에 말아서 먹어 내 눈치 보지 말고."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많이 할 걸 그랬나.

소주, 케이크, 미역국 뭐 그리 나쁜 조합도 아니다. 다행히 걸귀들처럼 다 먹어주었다.

모두가 돌아간 적막한 옥상 눈은 그쳤다.

아래층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별이 빛나는 밤에 이문세가 생일 축하 엽서를 읽고 있었다.



회한


하늘을 올려다보면 시린 별들

생일이 뭐 별건가

미역국 먹었으면 됐지

애써 위로해 보지만

서러워 떠오르는 얼굴 하나 있어

가슴 아프다

이 시간 깨어있을 어머니의 한숨


염려 마세요

미역국은 먹었으니 마음 놓으세요

오늘처럼 눈 내리던 그날

아버지는 노름방에 가시고

혼자서 저를 낳으실 때

산고보다 힘든 외로움은

어떻게 견디셨나요

눈이 그치고 새벽이 되어도

아버지는 오지 않고

열 살 큰누나가 미역국을 끓였다지요


오늘은

면목 없이 울고 싶네요

보고 싶어요

뻔뻔하게 고백도 해봐요

건강하시죠

염치없이 안부도 물어요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요


눈을 감았다 겨울 하늘도 문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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