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로선 May 31. 2023

시작하는 이들을 위해



음악다방 날라리 DJ 영준이 소주병으로 나발을 불었다. 영준이가 만나고 있던 혜란이가 임신을 했다. 전자회사 경리로 있던 혜란이는 퇴근만 하면

Music Box 앞에서  턱 받치고 신청곡을 듣던 다방 죽순이었다.

영준이 입장에서는 하늘이 내려앉고 땅이 꺼지는 청천벽력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할 거냐?"

"뭘 어떻게 해. 지워야지."

아무리 영준이가 감언이설로 설득을 해도 혜란이는 막무가내로 아이를 낳겠다고 우기는 모양이다.

"조금 있다가 이리로 올 거다. 좀 도와줘라. 너도 얘기 좀 잘해봐."

"이 미친 새끼 여긴 뭐 하러 와. 너희들이 해결해야지. 내가 무슨 말을 하냐."

혜란이 오자 두 인간이 쌍으로 티격태격 주접을 떨었다.

"혜란아 너 잘 생각해라. 인생이 달려있는 거야. 영준이가 내 친구고 네가 내 동생 같아서 하는 말인데 신랑감으로 나는 빵점, 저놈 마이너스다."

충고, 조언 비슷한 걸 해줬다.

혜란이가 찔찔 울면서 노려봤다.

"오빠도 똑같아. 영준이 오빠를 설득해야지 왜 나한테만... 그럼 생명을 죽이란 말이야?"

할 말이 없었다. 살인을 부축이는 파렴치한이 되고 말았다. 영준이 저 쳐 죽일 놈 때문에.

"야! 둘 다 나가라. 여기서 이러지들 말고."

더 있다간 나도 몹쓸 놈 될 것 같아 쫓아버렸다.



영준의 결심


영준은 다방도 결근하고 며칠을 보이지 않았다. 삐삐를 쳐도 연락이 없었다.

걱정돼서 그놈 안부를 친구들에게 물어봤지만 여전히 행방이 묘연했다.

이 시키가 혹시 극단적 선택을... 그럴 놈은 아니다.


봄비 오는 늦은 밤 영준이와 혜란이가 배시시 웃으며 팔짱을 끼고 화실로 왔다. 끝까지 혜란을 설득해서 수술이 예약돼 있던 날, 산부인과 앞에서 영준의 마음이 변했다고 한다.

그 길로 밤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여행을 갔단다.

혜란네 집에도 인사를 갔는데 혜란이까지 내쫓아 버려서 둘은 지금 여관에서 기거한다고 했다.

"그럼 너희들 신혼여행 갔다 온 거네, 앞으로 계획은 있냐?"

"혜란이 적금 깨고 내가 모아놓은 돈으로 월세방 알아보고 있다. 동거라도 해야지. 애 낳으면 얘네 부모님이 용서해 주시겠지."

며칠 새 영준이는 어른이 돼있었다. 영준이에게 저런 진중한 면이 있었나 낯설었다.

"돈 모자라면 말해라. 애들하고 모아볼게."

"오빠 나 빚지는 건 싫고 냉장고 하나 사줘."

혜란이가 멋쩍게 웃었다.

"혜란아! 저번에 영준이 신랑감으론 마이너스라고 했던 말 취소해도 되겠냐? 신랑감으로 나는 백 점 영준이는 기본 백점에서 플러스 백 점이다. 이래서 남녀 사이엔 끼어드는 게 아닌데 말이야."

영준은 어려서 부모님이 이혼을 하는 바람에 할머니 손에서 컸다. 부모의 정도 모르고 자랐는데 처갓집의 따듯한 환대라도 받으면 그나마 위안이 되겠지만, 영준이 말대로 아이 낳으면 가능할까. 그랬으면 좋겠다.



신혼 방 구하기


혜란이는 출근하고 영준이와 월세방을 보러 다녔다. 의외로 방 구하기는 힘들었다. 주인들은 하나같이 고압적인 자세로 세입자 면접도 봤다. 애들이 있느냐. 직업이 뭐냐. 술은 많이 마시냐. 정말 어이없는 말은 애들 있으면 세를 안 주겠단 것인데, 니기미 그러면 애들 있고 가난한 사람은 길거리에 나앉아야 한단 말인가.

이 보증금에 화장실 딸린 방 구하기도 어려웠다. 방은 많은데 공동화장실이었고, 어쩌다 화장실 딸린 방은 산 밑에 있거나 버스정류장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야! 너 혜란이 사랑하는 거냐. 아니면 책임감 때문에 이러는 거냐. "

넌지시 물어보면

"사랑이 별거냐 혜란이 하루 종일 생각난다. 그러면 사랑이지 뭐."

담배연기에서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며칠 새 이놈이 득도를 한 것일까. 아니면 나보다 더 독한 수행을 한 것일까.

아랫동네 사람들은 모르겠지.

달동네 옥탑방과 지하방에서도 사랑이 연꽃처럼 피어나고, 가끔은 행복한 웃음소리도 들린다는 것을. 돈으로 사랑을 거래하는 부르주아들은 모를 것이다. 비록 시궁창 같은 세상이지만 아직까지도 사랑을 밑천으로 시작하는 순백의 영혼들이 있다는 사실을.

초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머리 위에 잔인하게 내려 꽂혔다. 영준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연쇄점과 쌀집에서도 월세방을 알아봤고, 대문에 써 붙인 '월세방'과 후미진 골목에 위치한 작은 복덕방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찾아 들어갔다. 하루의 긴 여정이 끝나고, 감나무 한그루가 심어져 있는 언덕 위에

붉은 벽돌집 이층으로 계약을 했다.

화장실 딸려있는 방이긴 하나 전기세와 수도세는 세입자들이 나누어 내는 불편한 집이었다.

"혜란이가 맘에 들어야 할 텐데."

영준이가 걱정을 했다.



혜란과 영준을 위한 기도


화실로 돌아와 해바라기 소피아로렌 앞에서 술을 마셨다. 영준이는 소주를 맥주컵에 마셨다.

술이 들어가자 하루종일 방 얻으러 다니던 고단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새신랑 영준이가 술에 취해서 울었다.

유부남 되는 게 억울해서 울었는지 가정을 꾸리는 게 좋아서 울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저 자식의 강인함을 나는 믿는다.


그날밤 하늘에 대고 전능하신 신들은 다 모여서 이들을 보살펴 달라고 손을 모았다.

한동안, 가난을 그림자처럼 데리고 다녀야 할 이들이지만, 부디 행복이란 것도 느껴보기를 성심을 다해 기도했다.

야전 침대에서 침 흘리며 자빠져 자고 있는 영준을 깨워 혜란이가 기다리는 여관으로 보내고

100호 캔버스를 꺼내 밑그림을 그렸다.

혜란이가 필요하다는 냉장고를 사주위해서. 



사랑 별거 아니야


사랑 뭐 별거 있나

하루 종일 그대가 머릿속을 산책하면

사랑이지


사랑 뭐 별거 있나

가난하면 가난한 데로

서로 어깨를 껴안고 부자인 척 살면 사랑이지


사랑 뭐 별거 있나

밤하늘을 보며 저 별은 그대 별 저 별도 그대 별

우주의 별들을 다 주면 사랑이지


사랑 까짓것 별거 아니지

그대와 내가 눈만 마주쳐도 가슴 저리면 사랑이지

매거진의 이전글 새벽의 방문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