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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Jul 25. 2023

성탄절

그날엔 항상 눈이 내렸지



크리스마스 전날 밤 주일학교 아이들이 무령 교회에서 연극을 했다. 나는 누나들이 동방박사로 분장을 해준다. 수염까지 붙이고 나니 영락없는 페르시아 노인처럼 보였다. 철민이는 마구간의 당나귀였는데, 형들이 만들어준 당나귀 가면을 쓰고 말구유 옆에서 침 흘리며 졸고 있다.

황금, 유황, 몰약을 아기 예수께 바치고 연극은 끝났다.



광산의 겨울은


연극이 시작될 무렵부터 내리던 눈은 그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해마다 무령 광업소엔 눈이 무릎까지 쌓이고, 사택 슬레이트 지붕 끝에는 내 키만 한 고드름이 겨울방학 끝날 때까지 밑으로 자라고 있었다.

하루에 두 번 오는 버스도 며칠씩 자취를 감추어 무령 광산은 그야말로 고립무원( 孤立無援)이다. 강릉으로 전학 간 영식이의 편지도, 위문편지 썼던 군인 아저씨의 답장도 눈 속에 매몰돼 버렸다. 큰누나가 소포로 보냈다는 어깨동무와 종합선물세트 과자는 읍내, 큰 우체국에서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탄가루 풀풀 날리던 까만 신작로는 하얗게 지워졌고, 지워진 길을 바퀴에 쇠사슬을 감은 제무시가 지나간다. 탱크 같던 제무시도 언덕에서는 가마솥에 물 끓는 소리를 내며 어김없이 헛바퀴만 돌았다. 그럴 때마다 빌빌거리는 제무시 꽁무니에 매달려 시커멓게 뿜어내는 매연을 맛있게 먹었다.



새벽송


미끄러질까 봐 형들의 발자국만 졸졸 따라갔다.

벌써 방울 달린 모자에 쌓인 눈을 몇 번이나 털어냈다. 도깨비가 살고 있다는 늙은 소나무에서는 무게를 이기지 못한 눈덩이가 힘없이 떨어지고 부엉이는 먼 산에서 귀신처럼 웅웅거렸다.


나는 이 시간이 제일 좋았다. 하얀 눈밭에서 찬송가를 부르면, 애들과 욕하고 싸웠던 일들을 하나님이 용서해 주실 거라 믿었다. 교무실 담벼락에 '우리 선생님과 옆 반 선생님이 좋아한대요' 낙서했던 것과, 자다가 오줌 싸서 동생을 내 자리에 끌어다 놓은 것, 일 년 동안 죄지은 모든 것들도, 오늘 새벽에는 눈처럼 하얗게 죄 사함을 받을 것만 같았다. 벙어리장갑 낀 손을 호호 불며 기도를 할 때면, 혹시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와 내 어깨에도 날개를 달아주지 않을까 자꾸만 하늘을 올려다봤다. 양쪽 날개 죽지가 간질거렸다

 

교인들은 새벽까지 잠들지 않고 있다가 준비해 두었던 여러 종류의 과자를 자루에 담아 준다.

뽀빠이와 박하사탕이 제일 많았다.

광업소 부소장 미희네 집 앞에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부른다. 미희와 미희 엄마가 공책 50권을 자루에 넣어 준다. 역시 부잣집은 다르다.

미희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한다. 난 미희만 쳐다본다. 예뻤다. 천사가 있다면 저 모습일까. 루돌프가 되어서 나의 썰매에 미희를 태우고 교회까지 고 싶었다.  순간 눈을 뜬 미희와 눈이 마주쳤다. 콧물을 호로록 빨아먹고 '히죽' 내가 웃는다. 미희가 흰자위만 드러내고 눈을 흘긴다. 어제 내가 던진 눈덩이에 뒤통수를 맞아서 아직도 분이 안 풀렸나 보다. 저 지지배는 천사가 되기는 글렀다. 오늘 같이 성스러운 날까지 눈을 흘기고 지랄하는 걸 보면.


고요하고 거룩한 밤이지만 폭설은 멈추지 않았고, 형과 누나들은 산타 할아버지처럼 자루를 어깨에 메고 눈 속의 새벽을 열고 있었다.



성탄절 아침


새벽송을 돌고 나서 예배드릴 아침이 올 때까지

읍내에서 자취하는 고등부 누나와 성경공부를 했다. 그중에서도 바다에 길을 만드는, 모세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었다. 그러다 졸리면 한 번도 보지 못한 바다를 꿈꾸며 방석을 덮고 쪽잠을 자기도 했다.


하얀 아침 장로님이 커다란 종과 연결된 기다란 줄을 잡아당기자, 무령 광업소에 탄일종이 울렸다. 하나님과 일면식도 없는 아이들이 일 년에 한 번 교회 오는 날이다. 쫀드기 하나도 사 먹을 수 없는 아이들에겐, 성탄절만큼은 거짓으로라도 하나님을 믿어야 과자 한 봉지라도 얻어먹을 수 있었다.  


사택 아이들 절반이 예수님이 나누어 주는 과자를 받으러 와서는, 쑥스럽고 속 보이는 예배를 드렸다. 눈은 그쳤고 햇빛에 반사된 눈의 입자들이 사금파리처럼 반짝거리며 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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