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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선 Mar 28. 2023

큰누나의 겨울. 2



외할아버지는 큰누나 편


눈 덮인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외갓집이 보인다. 기역 자로 된 작은 기와집. 저녁밥을 짓는지 굴뚝에선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아침 첫차를 타고 출발했지만, 겨울의 짧은 해는 벌써 뒷산의 미루나무 허리 아래로 넘어가고 있었다. 아궁이에 불을 때던 할머니가 뛰어나와 큰누나 손을 잡고 반가워했다. 마루 밑의 메리도 짖지 않고 꼬리가 떨어질 정도로 흔들며 반겨 주었다. 안방에서 할아버지가 크게 헛기침을 했다.

"어서 들어가서 할아버지께 인사드려라."

할머니의 재촉에 아랫목에서 기다란 곰방대로 담배 피우던 할아버지께 절을 하고, 삼 남매가 할아버지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외할아버지는 외아들인 나보다 큰누나를 더 아꼈다.

아마도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큰애 너 폐병에 걸렸다고? 엄마가 편지에 썼더구나. 어쩌다 몹쓸 병이 걸렸을꼬, 걱정 말거라 할애비가 다 낫게 해 줄 테니 반년만 여기 있거라."

할아버지는 논농사와 밭농사를 짓고는 있었지만 약초에 대해서도 모르는 게 없었다. 젊었을 땐 약초 캐러 조선팔도 안 가본 산이 없다고 한다.

동네에서 면허 없는 야매 한의사이기도 했는데 혈자리를 몰라 침은 놓을 줄 모르는 한의사였다. 손주들 왔다고 할머니가 밥상이 꽉 차게 저녁상을 차렸다. 큰 누나도 따로 먹지 않고 같이 먹었다. 찌개 먹을 때만 덜어먹으라고 했다. 쌀밥이다. 생일날이나 명절 때 먹었던 쌀밥과,  들기름 발라 구운 김에 군침을 흘렸다. 닭고기 넣은 뭇국도 있었다. 누나의 국에만 닭다리가 두 개나 들어있었다.

미숙이가 닭다리를 계속 쳐다보자 누나가 나와 미숙이에게 하나씩 건져 주었다.

먹으려다 다시 누나 국그릇에 통통하게 살찐 닭다리를 퐁당 돌려주었다.


누나가 설거지하러 나갔을 때 할아버지가 나와 동생을 꿇어 앉혔다.

"미숙이 너 앞으로 큰언니 고기 뺏어 먹으면 혼난다. 폐병은 잘 먹어야 빨리 낫는 거란다. 이제 계속 언니만 고기 줄 건데, 언니 밥그릇 자꾸 쳐다보는 놈은 회초리 맞을 줄 알 거라. 미숙이 알았어? 이놈이 왜 대답이 없어."

할아버지가 양은으로 된 재떨이를 곰방대로 땅땅 치자 미숙이가 찔금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는 우리들을 큰누나 등골 빼먹는 놈들이라고 했다. 등골까지는 몰라도 우리들이 큰누나 청춘을 빼먹은 건 사실이다. 동생 셋 육성회비 대느라 국민학교 졸업도 못하고 식모 살다가 동상도 걸리고, 봉제공장에서 폐병도 걸렸으니까. 친할아버지는 외아들인 나를 대장으로 대접했는데 외갓집에선 미숙이랑 똑같은 계급이 돼버렸다.

아랫목에 배를 깔고 방학숙제를 할 때 큰누나도 엄마에게 편지를 썼다.

'부모님 전상서. 외갓집에 온 지 보름 되었어요.

할아버지가 보약도 다려 주시고 닥도 잡아서 백쑥도 끄려주시고 마니 건강해졌어요. 빨리나아서 공장 갈께요. 조금만 고생하세요.

동생들 고등하꾜 까지는 제가 보내께요.'

"누나 맞춤법 많이 틀렸어."

곁눈질로 보다가 누나 귀에 대고 속삭이듯  한마디 했다. 미숙이가 킥킥댔고 하얀 누나 얼굴이 빨개졌다.

"이 년이! 미숙이 너 큰누나 맞춤법 틀렸다고 비 웃으면 죽을 줄 알아."

벌떡 일어나 미숙이 얼굴에 주먹을 들이밀고 협박을 했다. 나는 항상 그랬다. 누구든지 큰누나를 조금이라도 괴롭히면 눈깔이 확 돌아버렸다. 동생이나 작은누나도 예외는 아니다.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말했듯이 큰누나를 엄마처럼 생각하라는 말을 철저하게 실천하고 있었다.



참새 사냥


할머니 할아버지가 큰누나만 데리고 오일장에 가셨다. 할아버지가 폐병은 잘 먹어야 된다고 했다. 특히 고기를 많이 먹어야 된다고 했는데 내 주위엔 눈을 씻고 둘러봐도 고기는 없었다.

순간 뒷마당 가래나무에서 시끄럽게 짹짹거리는 참새들이 눈에 띄었다. 닭보다야 훨씬 작지만 저것도 백 마리 잡으면 닭 한 마리는 거뜬히 될 것 같았다. 새총을 만들어 아무리 쏴대도 참새 깃털 하나 맞추질 못했다. 미숙이가 한심하게 보더니 대나무로 만든 소쿠리 하나를 들고 왔다. 마당에 엎어놓고 얇은 나뭇가지로 소쿠리 한쪽을 괴고, 나뭇가지에 실을 길게 연결해서 부엌으로 들어와 망을 봤다. 소쿠리 안에는 좁쌀을 솔솔 뿌려놓았다. 참새들이 마당에 내려앉고 좁쌀을 쪼면서 소쿠리 안으로 총총 총 기어 들어갔다. 미숙이가 잽싸게 실을 잡아당기자, 다 날아가고 동작 느린 참새 한 마리가 소쿠리 안에 갇혀서 퍼덕거렸다. 손을 넣어 발버둥 치는 참새를 잡아 싸리나무로 만들어놓은 감옥에 집어넣었다.

다섯 마리 잡았다.

참새들도 눈치가 있는지, 동료들이 몇 번 잡혀가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 마당에 내려앉지 않았다. 장에 갖던 누나가 오자 싸리나무 감옥에 갇혀있는 참새를 내밀었다.

"누나 이거 구워서 먹어. 누나 주려고 참새 잡았어."

할아버지는 크게 웃었고 큰누나는 조용히 울면서

싸리나무 감옥문을 열어주었다.



큰누나의 회복


외갓집에 온 지도 한 달이 넘었다.

할아버지는 지극정성으로 누나를 보살폈다.

폐병에 좋다는 한약재들을 구해와  하루 종일 달여서 먹였다. 약 달이는 날이면 미숙이와 내가 약이 졸아서 타지 않게 보초를 섰다. 가끔은 커다란 잉어도 푹 고아서 먹었는데, 큰누나가 할아버지 몰래 내 입에 넣어줘도 절대 먹지 않았다. 대신 미숙이 년이 날름  받아먹었다.

외할아버지 한약이 효과가 있었는지, 병원에서 타온 폐병약이 누나를 낫게 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큰누나의 얼굴엔 핏기가 돌았고 폐병약 먹고 나서 헛구역질도 하지 않았다.

밥도 깨작거리지 않고 한 그릇 다 먹었다.

"다음 주에 엄마가 너희들 데리러 올 거야."

화롯불에 구운 감자를 까주며 누나가 말했다.

방학이 끝나가는 것도 싫었지만 누나와 헤지는 게 더 싫었다. 겨울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침잠하고 있는데, 가래나무에 앉아있던 부엉이가 귀신처럼 울고 있었다.



비둘기호 완행열차


엄마가 데리러 왔다.

양평역 대합실 가운데 큼직한 연탄난로가 있고 주위로 사람들이 빙 둘러싸고 있었다.

누나가 역까지 배웅을 나왔다. 괜히 눈물이 났다. 큰누나 다리를 잡고 훌쩍거렸다.

"누나가 돈 벌어서 선물 많이 사가지고 갈게 그만 울어. 가자마자 편지 쓰고."

누나가 달래자 왕하고 울어버렸다.

까만 제복을 입은 역무원 아저씨가 개찰구 문을 열었다.

"누나 고기 많이 먹고 폐병 빨리 나아."

콧물을 훔치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때 내 나이 아홉

큰누나 나이 낭랑 십팔 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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