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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롱 Dec 08. 2021

유언

소풍 떠나는 날 남기고 싶은 축복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출처>  이형기의 落花,  시집[적막강산] 중에서

 

 먹는 즐거움이 삶의 낙이자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였던 때가 있었다. 대단한 대식가도 타고난 미식가도 아니지만 감각기관인 미뢰에서 음식을 만나자마자 폭발하듯 발산하는 신호를 수용하는 순간 돌고래 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입꼬리가 올라가고 기분이 좋아지는 원초적인 행복감을 만끽하던 날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맛있다고 소문난 곳이라면 굳이 찾아가 그 맛을 보고야 말 때다.

 그런 내게 갑자기 찾아온 원인불명의 어지럼증이라는 병은 무려 한 달간 곡 끼를 입에 댈 수 조차 없게 만들었고, 하루하루 말라가며 순식간에 신체의 시계는 죽음의 시간표를 향해 째깍째깍 달리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맛 기행 속 가이드를 자처하던 나의 일상은 이미 오래전 허물어진 황성(荒城) 옛터의 설움이 내려앉은 고요한 밤과 같다. 초점 잃은 눈동자는 천정과 벽지의 규칙적인 무늬를 따라 힘겹게 쫓다가 멈추기를 반복할 뿐이고, 고운 빛깔과 유혹적인 향기로 화려하게 자태를 뽐내던 꽃이 그 수명을 다하는 날 어김없이 뒤꼍으로 사라지듯 무기력해질 대로 무기력해진 나에게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유언)에 남은 힘을 다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처음 하얀 종이를 머리맡에 두고 게 숨을 내 몰 아쉬는데 마치 오래된 강둑이 무너지면서 유유히 흐르던 물줄기가 급물살을 타고 무서운 속도로 밀려오듯이 소리 없는 울음이 터져 나오더니 어깨까지 들썩거리기 시작한다. 그만 눈물을 멈춰 보려고 도리질해보지만 인체의 분비선에서 나올 수 있는 샘이란 모든 샘에서는 눈물, 콧물, 침과 땀까지 범벅이 된 채 가빠진 숨을 고르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른다.



'유언'

단지 이 두 음절을 떠올렸을 뿐인데 그 슬픔의 무게감이 그때에는 상상 이상으로 버거웠나 보다. 한 여름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 바닥 위에 넘어져 입게 된 화상 같은 찰과상이 마치 내 심장 한가운데에서 시작되는 듯한 통증이었다.

 그때 불현듯 입 밖으로 새어 나온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다만 악에서.... 다만....."

한 구절 한 구절 천천히 숨 쉬듯이 내뱉으며 비로소 평안함을 찾아가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젊은 날 처음 써 본 유언.

생전에 '나'라는 사람이 치열하게 달려온 삶의 흔적은 온데간데없고 '사후의 나'라는 사람이 줄 수 있는 물질적인 것이 무엇이 있고 얼마나 되는지 적는 일부터 시작되었고, 다른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유언을 쓰기로 마음먹었던 순간의 장면들은 다시 떠올려도 아프다. 그 뒤로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말이다.


 매일같이 한 움큼의 약봉지를 두세 번에 나눠서 입에 털어 넣어야 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기적처럼 건강해져서 지난날 기억은 어쩌면 한여름밤의 악몽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앞으로 수십 년 후인 노후 대비를 위한 계획까지 열을 올리며 이리저리 계산기를 두드리기도 하니 말이다. 그렇게 오늘의 난 지금 이 순간 허락된 일상에 감사 또 감사하는 훈련 중이다.



 

 그런데 왜 나는 다시 유언을 쓰는 걸까?

나를 알고 있는 소중한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나의 뒷모습이라고 생각해서다. 남겨질 사람들에게 나의 죽음을 영원한 헤어짐이 아닌 적당한 어느 날 떠나는 소풍으로 여기게 해달라고 말하고 싶어서다.

벼랑 끝에 선 듯한 아슬아슬하고 절박한 순간에 안간힘을 쓰며 유언을 남기고 싶지 않다. 오히려 햇살 좋은 날 푸르른 잔디밭에 소풍 나온 아이의 시선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온 마음과 정성을 담아 남기고 싶은 거다.


나의 사랑하는 엄마에게

엄마!

나의 유년시절, 엄마의 사랑이 내 삶에 절대적이었던 시절이 있었어. 그래서였을까 어른이 되어서도 '엄마'라는 단어만 봐도, 나지막이 부르기만 해도 또르르 눈물이 날 만큼 늘 애잔하고 그리운 마음에 흔들리기도 하는 삶을 살았던 것 같아. 우리 오 남매 키워내시느라 참 고생 많으셨던 울 엄마!

고된 식당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갑자기 뇌졸중에 하반신 마비까지 온 외할머니를 돌보랴 췌장암 진단으로 병실에 누워 계신 아빠 간호하랴 오 남매의 열개나 되는 도시락 싸가며 키우랴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아내셨을까, 그 막막하고 고된 시간들을 묵묵히 홀로 견뎌내신 엄마에게 난 반드시 기쁨이 되는 자식이 되고 싶었어.

그러고 보니 그 당시 엄마의 나이가 딱 지금의 내 나이더라고.  

 살아생전 엄마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여러 날 고민하면서 내가 간구할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기도'라는 걸 깨닫게 되었어. 그렇게 새벽잠 많던 넷째 딸내미가 이제는 새벽 재단을 쌓아가며 엄마의 건강을 위해서,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어.

지난날 엄마가 우리 오 남매를 위해 기도했던 그 새벽을 떠올리며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나이가 되었나 봐. 엄마를 정말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그리고 저의 엄마여서 참 감사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남편에게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 [열왕기상 2:1~4]

여보, 당신의 아내로 살아갈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유년 시절 어려운 형편에서도 참 반듯하게 자라온 당신이 내겐 늘 든든했고, 커다란 산 같은 존재였음을 고백하고 싶었어요. 우리가 만나 부부가 되고 엄마, 아빠가 되는 과정 속에서 모진 비바람과 풍랑도 있었지만 서로 두 손을 놓지 않았기에 오늘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한 가정의 아버지라는 무게감이 때론 많이 힘들었지요? 평소 속마음을 드러내는 법이 없어서 어쩌면 당신 마음을 더욱 몰라준 아내인 내가 퍽 섭섭했을 텐데, 그래도 어여쁜 자야 함께 가자고 해줘서 고마워요.

앞으로 다음 세대인 우리 아이들에게 축복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다윗과 같은 아버지의 자리를 지켜주기를 바라며 평소에는 못했던 말이지만, 언제나 당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보물 1호와 2호에게

이 땅에서 엄마라는 이름을 선물해준 귀한 나의 보물 1호와 2호!

부족하고 서툰 엄마라서 참 미안한 날이 많았는 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 품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다고 말해주는 우리 보물들이 있어서 참위로가 되고, 점점 엄마라는 자리를 배워가는 중이야.

너희로 인해 우리 집에 행복하고 즐거운 웃음소리가 퍼지게 되었고 온기로 따뜻해지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어. 세상에 공기가 없으면 숨을 쉴 수 없다고 하듯이 우리 집에는 너희가 공기와 같은 존재였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

 나의 아들로 와 줘서 고마워~

엄마의 보물들,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을 찾는 데 한참이 걸렸지만 이제는 눈물로 종이를 적시는 것이 아니라 감사한 마음으로 넉넉한 미소 지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와 인연을 맺고 귀한 시간들을 공유할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사랑합니다.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사람들은 많은 배움을 얻지만, 대개 그 배움을 실천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습니다.
애리조나 사막으로 이사하던 해인 1995년, 나는 뇌졸중을 일으켜 신체의 일부가 마비되었습니다. 그 후 몇 해동 안은 죽음의 문턱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때로는 금방 죽음이 찾아올 것처럼 느낀 적도 있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데 죽음이 찾아오지 않아 실망한 적도 있습니다. 내가 죽지 않은 것은 삶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마지막 배움 말입니다.

우리들 각자는 내면에 간디와 히틀러가 있습니다.
간디는 우리 안에 있는 최상의 것, 우리 안의 가장 자비로운 모습이고,
히틀러는 최악의 것, 부정적이고 편협한 모습입니다.
그런 편협함과 부정적인 모습을 걷어내고, 우리 자신과 서로의 안에 있는 최상의 것을 발견하는 일이 곧 우리가 배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과 타인을 서로 치유하기 위해 이곳에 있습니다.
육체적인 회복이 아니라 훨씬 더 깊은 치유, 정신과 영혼의 치유를 위해                                                       

                                                                [출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말 "인생수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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