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주변에 비교적 젊은 분들의 암 투병소식을 연달아 듣게 되면서 날마다 중보기도로 더욱 간절하게 시간을 보내는 중, 지난 주일 "아픔도 슬픔도 감사가 됩니다"라는 설교 말씀 중간에 목사님의 아픈 가족사가 소개되었다.
2014년 5월, 조산으로 응급 수술을 통해 태어난 아이가 숨을 쉬지 못하고 뇌로 산소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결국 뇌병변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 그 당시 서울로 어디로 대형병원 이곳저곳 안 가본 곳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매한가지, 오히려 최악의 상황에 대한 마치 선고 같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처럼 꽂히는 날이 연속되면서 태어난 지 몇 주 되지도 않은 아이의 장례식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던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아이에게 한없이 미안하다고 힘겹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홀로 차 안에서 긴 터널을 지나던 중에 북받치는 감정으로 기도를 하게 된다.
" 제 수명을 20~30년 줄여서라도 제 아이 좀 고쳐주시면 안 될까요? 아니 당장 제 목숨을 가져가셔도 좋으니 제발 아이 좀 고쳐주세요. 이 터널을 빠져나오는 순간 역주행하는 차에 의해 갑자기 사고를 당해도 좋고 전신주를 들이박아 그 자리에서 죽게 되더라도 좋으니 제발 아이만 고쳐주세요."
기도를 마치고 터널을 빠져나오는 순간
"네 목숨을 버릴 만큼 네 아이를 사랑하듯이 내가 너를 그렇게 사랑한단다."
라는 주님의 음성 같은 메시지를 듣게 되고 그 이후 아이들을 대하는 마음, 목회에 임하는 자세는 완전히 변화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아가페 사랑은 그저 신학대학에서 이론적으로 배워서 알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처음으로 이것이 진정 '아가페'구나 깨닫게 되었다고...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 올해 여덟 살이 된 아이는 집안에서 온 방바닥을 기어 다니고 유모차 없이는 단 백 미터 앞 외출도할 수 없으며 "엄마! 아빠!"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 아이의 순수한 눈빛과 사랑스러운 미소가 얼마나 엄마 아빠에게 큰 평안을 주는지 '기적'이자 '축복'이라고 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교회를 다니면서도 기복신앙의 관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내가 잘 나갈 때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힘들거나 고난이 닥치면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냐고 따져 물으며 세상에 하나님은 없다고 등 돌리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그랬다. 다른 사람들을 쉽게 정죄하기도 했고, 나는 아닌 척 나는 착한 척 가면을 쓰는 일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 자신에게도 그러한 탐욕과 죄성이 있는 건 아닌 지 스스로 되돌아보고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 당시 목사님 또한 수없이 묻고 또 물으셨다고 한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삼대(三代)째 지금까지 하나님 말씀 순종하며 열심히 잘 섬기고 살았잖아요!?
제가 목회자인데 이제 저 어떻게 해야죠?"
그 과거의 시간 속 먼발치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목사님의 흐느낌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십만 분의 일이겠지만 어떤 심정이었을지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아서 듣는 내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요시타케 신스케의 《이게 정말 나일까?》라는 해석을 통해 영적 교훈
주인공 지후는 매일 많은 숙제와 잦은 심부름으로 힘든 하루를 보내다가 자신을 대신할 만한 로봇을 하나 구입하게 되고, 그 로봇에게 또 다른 지후 노릇을 할 수 있는 "가짜 자기"가 되라고 말한다.
"그러면 주인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주세요."
라는 로봇의 질문에 지후는 이름과 인적사항 그리고 가족관계에 대해서 알려준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조금만 더 자세히 알려주세요!라고 로봇이 말하자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그리고 자신이 태어나기까지 엄마와 아빠(부모)와 그 부모의 부모, 그 조상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지후 자신은 아직 만들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에 실수도 많이 한다고 덧붙인다.
어렸을 때부터 신나고 재미있었던 일뿐 아니라 아프고 힘들었던 경험으로 말미암아 아기 때부터의 '나'가 내 안에 모두 들어있다고 말한다.
《이게 정말 나일까?》는 아이들 뿐 아니라 우리 어른에게도 생각거리를 던져주며 도움이 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할머니가 말씀하셨는데, 인간은 한 사람 한 사람 생김새가 다른 나무 같은 거래. 자기 나무의 종류는 타고나는 거여서 고를 수는 없지만 어떻게 키우고 꾸밀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대.” “나무의 모양이나 크기 같은 것은 상관없어. 자기 나무를 마음에 들어 하는지 아닌지가 가장 중요하대.”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간다는 것은 나 자신을 사랑하면서 성장하는 첫 관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누구인지를 알리고 나를 포함한 우리에 대해 생각하며 남이 나와 다름을 처음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게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
겉모습과 취미, 특기뿐만 아니라 ‘관계 속에서의 나’까지도 생각하게 되고, 언제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각 역할이나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족과 있을 때의 '나'와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의 '나'는 말투나 행동이 다를 수 있다.
예를 들면,
내가 생각하는 나는 ‘소심하긴 해도 나누길 좋아하는 제법 괜찮은 사람’인데
엄마가 생각하는 나는 '사막에 혼자 떨어져도 살아남을 만큼 생존력 짱, 강한 아이'이고
동생이 생각하는 나는 ‘제 잘난 맛에 사는 콧대 높은 여자’ 일 수도 있고,
선생님이 생각하는 나는 ‘숫자만 보면 뇌가 멈추고 울렁증이 있는 수포자 학생’ 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이다.
우스갯소리로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고, 어쩌면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 이유가 이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 안의 끊임없는 탐욕과 가시 같은 말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그만 멈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사람 역시 이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는 유일하고 소중한 존재니까.
선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나를 거룩함으로 덮어야 한다는 말씀이 어떤 것인지 이제야 깨닫게 된다. 마흔이 넘어서도 내가 누구인지 알쏭달쏭하지만 그런 모습의 나라도 지금은 사랑할 수 있게 된 시간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