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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ssy Jun 19. 2022

첫 아이를 가지다

27살 겨울에 4살 더 많은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했다.

빚으로 시작한 우리는 아이를 2년 정도 후에나 갖자고 했다.

  

면역력이 약한지 겨울이면 늘 감기를 달고 사는 나는 결혼 초 감기 증상 때문에 다니던 회사 근처 약국을 찾았다. 약사에게 증상을 말하니, 첫마디가 "혹시 결혼하셨어요?"이다. 여태까지 감기약을 지으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없었던 터라 좀 의아하긴 했지만 결혼했다고 답했다. 약사가 의외의 말을 한다. "그럼, 일단 '산부인과'부터 가보시고 오세요."


속으로 '먼 소리야?' 하면서 일단 약국을 나왔다. 남편에게 말하니 일단 그렇게 해보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산부인과를 가봤다.


산부인과에서 내주는 이상한 자루 같은 치마를 입고 나를 남에게 보여주었다. 너무 당황했던 나는 일 분이라도 빨리 끝내고 싶었다. 의사가 검사를 하더니 임신이란다. 그나저나 질염이 너무 심한 상태니 질염부터 치료해야 한다며 내 속에 이상한 약을 발라 주었다. 질염이 뭔지도 몰랐던 나는 그냥 의사가 시키는 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결혼이란 걸 하니 별 희한한 병도 다 걸린다 싶었지만 생각보다 빨리 나았다.


계획보다 빨리 찾아온 첫아이.. 하지만 아이를 어찌해보겠다는 생각은 1%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먼저 간 약국의 약사가 너무 고마웠다. 지금도 풀리지 않은 궁금증이 왜 그 사람은 나에게 결혼 여부부터 물었을까? 여태 감기 증상으로 병원을 찾아도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내가 만약 그때 다른 약국을 갔더라면 그래서 감기약을 지어먹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미국인과 결혼한 어떤 유튜브를 봤는데, 엄마가 자기를 가졌을 때 임신인 줄 모르고 감기약을 지어먹어서 양 눈 쪽이 기형으로 태어났단다. 여러 번의 수술을 했지만 정상인의 눈 모양은 만들기 힘드니 몸을 혹사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성형외과 의사가 말했단다.


 얼핏 봐도 눈이 좀 이상했다. '이런 눈으로 결혼이나 할 수 있을까' 생각했을 정도란다. 그래도 그 사람은 자신의 외형 문제를 커버할 방법을 운동으로 찾았고 완벽한 몸매를 가진 태권도 5단 보유자가 되었다. 한국인이면 그 사람의 눈을 보고 누구나 이상하게 생겼다고 했겠지만 신기하게 미국인인 남편인 원래 동아시아 사람들의 눈이 다 그렇게 생겼지 않냐고 특별히 이상한 걸 모르겠다고 한단다.


어쨌거나 그 유튜브는 자신의 약점을 커버하는 방향을 아주 긍정적인 쪽으로 발현시켜 내 눈엔 매력덩어리 여자로 보인다. 하지만 막상 내 아이가 그렇게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미치니 심장이 뛰었다. 그런 신중한 약사를 만난 건 내 일생의 행운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아이를 가진 후로는 회사에서의 업무 태도도 많이 바뀌게 되었다. 내 일이 공장의 생산현황 체크 및 선적 현황을 미국의 바이어와 긴밀히 연락하며 보고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공장들에 까칠하게 굴 수밖에 없었고 목소리가 커지는 일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공장에선 내가 악명 높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이를 갖고 나서부턴 아이를 위해서라도 부드럽게 말하고 아이에게 독이 될 수도 있는 아드레날린이 나올 일은 가능한 한 만들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이를 가진 후부터 내 삶은 많이 변했지만 남편의 삶은 크게 변한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여전히 회식에, 마라톤에,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 산부인과 가는 날은 늘 동행하긴 했지만 여전히 불만스러운 게 많았다.


임신을 하니 검사항목이 너무 많다. 당뇨, 기형아, 빈혈 등등.. 의사가 내 빈혈 수치가 너무 낮다며 걱정한다. 8.2.. 빈혈 수치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나는 처음엔 그게 얼마나 심각한지도 몰랐다. 그나마 흡수율이 좋은 액상 철분제를 처방해 줬고, 낳기 직전까지도 토악질 나오는 걸 겨우 참아가며 부지런히 챙겨 먹었으나 무심하게도 수치 변화가 하나도 없다. 정상수치가 12이고 최소한 10은 넘겨야 한다는데 어림도 없다.


만약 수술을 하게 되면 출혈이 심해지고 수혈을 해야 할 수도 있다고 의사가 알려줬다. 남편도 걱정이 되는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여태껏 수혈을 통해 모아 왔던 10개 정도의 수혈증 카드를 내게 내민다.


출산휴가 직전까지도 버스로 출퇴근하던 어느 날, 버스 안이 만석이라 서 있는데 갑자기 온몸에 식은땀이 쏟아진다. 그대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버티고 서 있다가 마침내 앞쪽에 빈자리가 하나 보였다. 어디서 힘이 나왔는지 미친 여자처럼 그 자리만 보고 필사의 노력을 다해 몸을 겨 겨우 자리에 앉 마침내 좀 진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빈혈 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런 일은 종종 생겼다. 혼자 집 근처 공원 산책을 하다가 갑자기 또 '핑'돈다. 빨리 빈 벤치 쪽으로 가서 앉았다. 그렇게 잠시 쉬고 나면 좀 괜찮아졌다.


이제 예정일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남편과 함께 산부인과를 찾았다. 아이가 내려올 준비가 아직 안 된 모양이다. 남편이 의사에게 묻는다. "선생님, 제가 마라톤을 참석해도 되겠습니까?" 너무 어이없는 질문이었는데 또 의사의 답이 더 황당하다. "네. 전혀 상관없습니다. 아직 내려올 기미도 없으니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그래도 예정일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고, 첫 아이라 마음도 불안한데 이 두 남자의 대화는 그야말로 기가 막히다.


그 주에 남편은 '포항 마라톤'을 <아내의 순산의 위해 달린다>는 희한한 사명감을 갖고 출전했다. 아.. 난 이 남자랑 계속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마저 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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