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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ssy Jun 29. 2022

어머니

내 아버지는 내가 기억이란 걸 할 수 있기 전에 이 돌아가셨다. 나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냥 가족들에게 주워듣고 짜 맞춘 내용뿐이다. 간경화로 보험도 없이 빚으로 병원비를 당겨 쓰다 보니 집은 빚더미에 앉게 되었고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가게 딸린 집을 팔고 네 명의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백만 원짜리 단칸방 셋방에서 다시 시작하셨다. 지금 내 나이보다 훨씬 어린 30대 중반에.


그 많은 자식을 그것도 남들이 모두 포기하라는 아픈 큰 아들까지 모두 돌보며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열일 마다않고 해내셨다. 그 시대엔 그런 엄마들이 많아서 해낼 수 있었던 걸까? 지금 내가 하는 고생은 같은 나이의 엄마 삶에 비하면 그냥 호강에 겨워 놀고먹는 한량의 배부른 신세한탄에 불과하리라.


도저히 먹고살기 힘든 엄마는 이웃의 도움으로 싱글맘이 무료로 지낼 수 있는 희망 모자원으로 이사하게 되었고 내가 알기론 3년 정도 단지 내에서 방적 일을 하면서 각자의 호실을 배정받아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워낙 어렸기에 기억의 오류가 분명 있겠지만 그곳 생활이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원장님 댁을 제외하곤 다 사는 게 비슷해서 서로 친자매처럼 친 오누이처럼 돕고 잘 지냈다. 하나의 출입구가 있는 커다란 단지 형태로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엄마도 아이들 걱정 없이 좀 편하게 일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약속된 3년이 지나 우리는 그곳을 떠나야 했고 그때부터 우리의  떠돌이 셋방살이는 또다시 시작되었다. 한 칸 방에서 다섯 명의 가족이 이불을 나눠 쓰며 지냈다. 아버지의 부재가 힘들었지만 같은 공간에서 세 들어 사는 다른 집 술 주정뱅이  아버지를 보며 내심 '저런 게 아버지의 모습이라면 없는 게 낫지' 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다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친구들 집을 가보게 되었고 너무 좋은 집에서 맛있는 산해진미를 먹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그런 마음을 알리 없는 엄마는 이번엔 방이 두 개나 되는 셋방으로 이사 가게 되었다며 행복해하신다. 여러 가구가 화장실을 나눠 써야 하고 텔레비전도 없어 파란색 스머프도 못 보는데 뭐가 그리 행복한지.


나의 그 철없는 생각을 알리 없는 엄마는 조금씩 나은 집으로 이사 갈 때마다 들떠 계셨고 막상 이사를 가보면 나의 기대는 역시나 실망으로 바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사 갈 때마다 얼마나 발품을 팔고 돈을 마련하며 동분서주하셨을까 싶지만 그 시절 나는 친구 집의 침대, 피아노, 고급차, 칼라 텔레비전, 그리고 어마어마한 농장과 근처 호수에서의 고무보트놀이가 부러울 뿐이었다.


드디어 내가 고2가 되었을 때 엄마는 25평 국민아파트에 당첨되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처음 자신의 명의로 된 집을 가지게 되어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그 시절 나는 그런 엄마의 마음을 잘 몰랐다. 어머니란 이름으로 하루하루 힘들게 버텨내던 그 모습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야 조금씩 알게 되었고 아직 알아가는 중이다.


어느새 여든이 되신 엄마는 너무 많이 휘어진 두 다리를 수술하셨고 지금 병원에서 회복 중이시다. 어떻게 하면 살아계신 동안 <어머니>란 이름으로 희생하신 부분을 최대한 보상해 드릴 수 있을지. 건강하게 잘 회복하셔서 곧게 쭉 뻗은 두 다리로 통증 없이 마음껏 다니시길 간절히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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