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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ssy Jul 07. 2022

밥퍼 봉사(인도네시아)

아이가 중. 고등학교 들어가면 한국처럼 인도네시아 한인학교도 일정 시간의 봉사 시간을 채워야 한다. 하지만 한국이 주로 우체국, 어린이집, 경로원 등의 장소로 아이만 직접 가서 하는 봉사라면 (이것도 미리미리 신청하지 않으면 참여하기 아주 어렵다.) 인도네시아는 한글학교 교사 도우미나 밥퍼 봉사를 많이 한다.


특히 선교사님이 운영하시는 밥퍼 봉사시간은 부모 중 한 명이 반드시 참여해야만 시간을 인정해주는 특별한 시스템을 갖고 있다. 식사 준비를 하기엔 어른의 손이 필요해서 그런 것 같다. 큰 아이 봉사시간을 위해 따라가려면 작은아이를 어디다 맡겨야 하니 해외에서는 그것 또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아이 봉사시간은 채워야겠고 부모가 따라가지 않으면 인정이 되지 않는다 하고 조금은 귀찮은 마음으로 행여 자리가 없을까 봐 빨리 신청했다.


토요일, 드디어 처음 밥퍼 봉사를 하는 날이다. 어렵사리 작은아이를 이웃에 맡겨놓고 한 시간여 차를 타고 자카르타 밥퍼해피센터로 향했다.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있었고, 봉사를 이끄시는 분이 선교사님 이시라 기도로 시작했다. 주부 경력에 비해 일을 했다는 핑계로 주방일이 아직 서투른 나는 많은 일거리를 본 순간 살짝 아득한 막막함이 느껴졌다. 1200개의 도시락을 준비해야 하다 보니 닭의 양도 어마어마했다. 내 평생 보아 온 닭보다 더 많은 닭을 칼로 탁탁 자르고, 씻고, 튀겼다 (튀기는 것은 현지 도우미 분들이 해주셨다.). 인도네시아 날씨가 워낙 덥다 보니 어느새 온몸이 땀범벅이 돼버렸다.


준비된 음식들을 포장하는 시간이다. 참석한 모든 인원이 하나의 시스템화 된 컨베어벨트처럼 착착 움직였다. 먼저 준비된 일회용 빈 도시락통에 각자 맡은 음식을 순서대로 하나씩 담고 다음 담길 음식을 위해 밀어주면 밥, 야채(오이, 당근), 닭튀김, 삼발소스가 모두 채워진다. 빠진 게 없는지 확인하고 스테이플러로 찍으면 마침내 하나의 도시락이 완성다. 대학교 일 학년 방학 때 군수용품 공장에서 기계의 일부가 되어 아르바이트하던 내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우리가 준비한 메뉴들로 일하느라 주린 배를 채우니 어찌나 꿀맛이던지 인도네시아 현지식으로 조리한 닭이 너무 맛있어 두 개나 먹어 치웠다. 먹은 걸 정리하고 이제 우리는 빈민촌으로 향했다. 더워서 그런지 걷는 게 이상할 정도로 걷는 사람이 별로 없는 인도네시아에서 빈민촌으로 향하는 길은 멈출 줄 모르는 차들이 쌩쌩 달리는 대로를 걸어 지나야 했다.


리더인 선교사님은 늘 다니셔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지나시며 따라들 오시라 하셨다. 차들은 여전히 속도를 줄일 줄 모른다. 인도도 없고 신호등도 없고 그야말로 큰 도로 한가운데를 지나야 하는데 이건 목숨을 건 횡단이었다. 선교사님은 "지금 가시면 됩니다" 하지만 한국 같았으면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횡단을 끝끝내 해냈다.


한 고비 넘겼다며 한숨을 내쉬니 아뿔싸 이제 시작이다. 앞에 깜깜한 굴다리 같은 게 보였다. 키가 작은 나도 허리를 90도로 꺾어야만 지나갈 수 있는 좁고 어둡고 낮은 굴다리였다. 너무 어두워 앞에 보이는 게 없었으므로 앞사람의 옷을 살짝 잡아야만 나아갈 수 있었다. 무섭고, 냄새나고, 동물도 있는 것 같고 끔찍했다. 나도 나지만 마치고 나서 우리 큰 딸은 또 얼마나 짜증 낼지 생각하니 벌써부터 답답해왔다. 도대체 사람들이 어디에 살고 있다는 건지..


그렇게 끝없어 보이던 동굴 같은 굴 속 지나니 지독한 냄새와 함께 넓은 평지가 나왔다. 쓰레기 매립지 같은 곳이었다. 철거민이 되어 쫓겨난 그들은 이곳에 그들의 터전을 잡고 목숨만 연명하고 있는 것이었다.


불쌍하단 생각과 동시에 이런 곳으로 끌려 온 여중생 딸의 불평을 어찌 감당할지가 또 다른 난관이라 생각되어 아이의 표정을 살짝 살피니 아이의 표정에 의미심장한 어떤 것이 스치더니 갑자기 스스로 일거리를 찾아 나선다. 쓰레기 냄새 지독해서 싫다고 차에서 나오지 않는 친구도 있었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원래 자기 일이었던 것처럼 아이들을 줄 세우고 상자에서 꺼낸 도시락을 나눠주기 시작하는 것이다. 쉼 없이 마지막 남은 도시락까지 나눠준 다음에야 마무리를 하고 잠시 숨을 돌린다. 그 모습이 너무 신기했다. 내가 그동안 이 아이를 너무 낮게 평가해 온 건지.


파김치가 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이가 한 마디 했다. "엄마, 나 이거 매주 하고 싶어." 기가 막혔다. 이렇게 힘든 일을 매주 하고 싶다고? 힘들지도 않은가? 하루 종일 해야 하고, 일도 쉽지 않았다. 아니 어려웠다. 그런데 이 아이는 불쌍한 빈민을 도우면서 너무나 큰 사랑을 느낀 것이다. 내가 십수 년 키운 내 딸이 맞나 싶었다.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아이들은 모두 지쳐있고 어른들도 전부 힘들었다고 하는데, 우리 딸은 내가 예상했던 무한대의 불평이 아니라 무한의 사랑과 감사를 느끼고 온 것이었다. 그날 처음으로 아이 그릇의 크기가 너무 큼을 느꼈다.


그 사랑이 많던 아이가 어느새 대학생이 되었고 이제 학교에서 주관하는 해외봉사 참가를 한 달 앞두고 있다. 기대와 달랐던 대학생활에서 힘들어하는 아이에게 해외봉사가 또 한 번 박차를 가하는 에너지를 줄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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