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씨가 날아와 풀을 뽑기 귀찮아 작은 벽돌들로 막아놓은 뜰의 틈 속 흙 사이로 자리 잡았다. 고추씨는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다니진 못하니 내가 먹고 실수로 버린 씨앗이라는 쪽이 맞겠다.
처음엔 풀인가 하고 뽑아버리려고 했다가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그냥 두었더니 드디어 꽃이 폈다.
이건 한국에서 먹는 고추와는 종자가 살짝 다른 짜베라고 불리는 인도네시아 고추다. 다 자라면 크기가 새끼손가락만 하다.
자기 혼자 누구의 돌봄도 없이 저렇게 꽃을 피웠다. 꽃이 폈다는 말은 곧 결실도 있을 거라는 의미인데 정말 고추가 열리면 너무 놀랍지 않을까?
나는 식물을 잘 키우는 편이 아니다. 한국에 살 때 우리 집에 들어오는 식물들을 모두 비실 비실하게 만들어 놓으니 친정 엄마가 방문하시면 늘 한 소리 하시면서 하나하나 입양해 가셨다.
친정에 가보면 우리 집에서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비실거리던 화초들이 하나같이 기세 등등 꽃을 피우며 나를 비웃고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키우나 궁금해서 자세히 관찰해보니 때때로 물 샤워는 기본이고 수액 같이 생긴 영양제며 잎 하나하나까지 일일이 닦아 주신다. 사랑과 애정을 듬뿍 쏟아 주시는 거다.
한국에 있는 동안 나는 화초와 맞지 않는 게으른 사람이라고 스스로 단정 짓고 있었다. 그러다 7년 전 인도네시아로 이사 왔고 시간적 여유가 생긴 나는 뜰에 작은 아이 보라고 큰 기대 없이 먹고 남은 멜론 씨, 파프리카 씨, 방울토마토씨, 카사바 나무 조각, 파파야 나무 조각, 고구마, 파인애플 윗부분까지 심어 보았고 모두 결실을 맺었다.
인도네시아 스마랑 지역으로 이사 온 지 2년, 수도에서 좀 떨어진 곳이라 그런지 여긴 말벌부터 손바닥만 한 사마귀, 대왕 메뚜기까지 날아다니니 굳이 유인할 거리를 던져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식물 키우기를 포기했고 앞. 뒤 뜰의 흙을 모두 벽 돌로 막아버렸다.
그런데 그 벽돌 틈을 비집고 저렇게 홀로 자라난 고추를 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사춘기 아이를 키우며 홀로 너무 과보호 속에서 자라 아무것도 못하는 모습이 내 탓인 것만 같기도 해서 스스로 할 수 있게 이것저것 가르치고 싶은데 아이는 배울 마음이 크지 않아 보인다.
내 삶을 돌아본다. 나는 방목되어 스스로 살아온 경우라 살기 바쁘셨겠지만 자식의 미래에 조금만 더 신경 써 주셨더라면 좀 더 잘 되어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간혹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의 한 친구처럼 하루 일과가 엄마의 분당 계획표에 의해 돌아가야만 했던 삶이었으면 또 숨 막혀 일탈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본다.
지금은 호주로 돌아가서 여기 없지만 가족같이 지낸 친구 레베카를 보면 아이의 무거운 가방은 고사하고 잃어버리고 간 소지품도 챙겨주지 않는다. 함께 놀러 가도 딸만 셋이라 그런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돈 드는 체험을 시켜주지 않았다. 앞으로 어른이 돼서 겪을 시련에 미리 단련시킨다는 취지로 무척이나 비허용적이었다. 규칙을 어기면 어김없이 어떤 형태로던 벌이 뒤따랐다. 하지만 가족 안에 사랑은 넘쳐났다.
삶에 정답은 없다. 오늘도 아이를 좀 더 이해하고 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청소년 심리 공부를 한다.
훗날 아이들이 우리 엄마는 따뜻하고 우리들에게 사랑을 참 많이 주셨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사랑을 영양분 삼아 살다가 힘든 시기가 오면 잘 버티고 지혜롭게 이겨 나가면 좋겠다.
그나저나 저렇게 홀로 아무렇게나 자라 버린 고추나무는 옮기지도 못하고 그저 바라만 봐야 하니 애처롭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