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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ssy Aug 12. 2022

나의 해외생활 첫 인연 호주 가족

나는 어릴 적부터 가족 따라 교회를 다녔고 교회 행사 때마다 앞에서 가스펠 독창도 하고 중창도 했지만 신앙과는 동떨어진 그냥 <교회 다니기>를 했다. 그러다 사춘기가 왔는지 청소년부에서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다니는 교회 생활이 점점 싫어졌고 결국 <무교>처럼 되어버렸다.


어쩌다 남편 따라 무슬림이 대다수인 인도네시아에 왔고 단지 내에서 우연히 호주 선교사 가족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전혀 다른 이 나라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들었던 그들의 시간들을 나에게 전해 주었고, 아내인 레베카는 손으로 가슴을 가리키며 마음을 이곳에 두어야만 비로소 진정 이 나라에서 살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들은 선교를 위해 오긴 했지만 사실 <인도네시아=발리> 정도로 생각하고 최종 결정했다고 말했다. 막상 와보니 당시 사는 곳에서 바다를 보기란 너무 어려웠고, 때마다 울려대는 이슬람 <아잔> 소리, 공단지역이라 매연에 오염된 하늘, 너무도 더워 지치는 일상 그리고 호주와 확연히 다른 사람들과 문화에 적응하는데 3년이 걸렸다고 털어놨다.


그들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시작했고 결국 5년 만에 백 명 넘게 전도를 했고 일요일 예배를 위해 빌린 호산나 병원 6층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교인들은 계속해서 늘어났고 나도 어느새 주일마다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한 지 2년이 넘어가게 되었다.


그 해는 유독 그 가족이 인도네시아 체류 비자받는 게 힘들었다. 이민국 사람들도 계속 여기서의 봉사활동 증빙을 더 복잡하게 요구했고 그렇게 밝기만 하던 막둥이도 그즈음 갑자기 호주 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칭얼댔다. 2년을 지켜봤지만 케이티가 그렇게 징징대는 건 처음 보았다.


그들은 여러 과정을 거쳐 인도네시아에서 가까운 싱가폴을 다녀오면서 어렵사리 일 년 치 체류 허가를 받았고 나는 내심 <앞으로 일 년은 더 여기 있겠구나>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나에게 이곳 생활의 태양이었고 내가 살 수 있게 해주는 모든 에너지를 제공해주는 에너지원이었기 때문이다.


일 년 치 비자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앞에 아이 픽업을 위해 가니 레베카의 혈색이 너무 창백했다.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웃으며 말했다.

"레베카, 거기서 자고 있으면 어떡해? 잠은 집에서 자야지"

근데 평소와 달리 그냥 피식 웃기만 하고 댓구가 없다. 속으로 <무슨 일이 있나..> 걱정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렇게 갑자기 떠날 거라는 예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일요일이 되었고 교회를 갔다. 예배를 마치며 공지가 있다고 했다. 그냥 점심식사 관련이겠거니 했는데 얼마 전 가족이 기도중 다시 호주로 돌아가라는 응답을 받았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어렵게 비자를 받아놓고서 이렇게 갑자기 떠나겠다고? 나는 나도 모르게 앉은자리에서 울음이 터져버렸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있는 곳에서 목놓아 울어보기는 처음이었다.


레베카는 몇 번이나 나에게 말을 하려고 했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했고, 미리 말 못 한걸 너무 미안해했다. 그녀는 막둥이 케이티가 '할머니 계신 호주로 가고 싶다' 할 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징표가 있었는데 자기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거라 했다. 가족 기도중 모두 같은 응답을 받았고 시니어 목사님으로부터도 같은 말을 들었다고 했다.


프랭크는 처음엔 불평을 했다고 했다. 이제 겨우 교회도 부흥하고 교인도 늘어나고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지금 내려가라 하는지 원망스러웠다고 했다. 지금 이 좋은 상승 분위기를 모두 내려놓고 호주 가서 골프나 치라고? 답답하지만 그들은 듣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모든 결정이 났을 때 호주 어머니께 전화했더니 전날 밤에 아들 프랭크가 그 집 침대에서 자고 있었고 그 꿈이 너무 생생해 아들을 만지는 촉감까지 기억날 정도였다고 하셨단다.


 가족은 새벽 5시 가족 예배로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 5시 간단한 가족 예배 및 기도로 마무리한다. 늘 기도를 하고 모든 문제는 기도로 답을 찾으며 성령이 늘 함께 하며 길을 인도해주신다고 했다.


그 가족과 너무 많은 일상을 함께 하다 보니 호주로 돌아가게 되는 과정도 모두 지켜보았는데 정말 신기했다. 저렇게 믿음이 강하면 하나님과의 강한 교류가 가능한가 싶은 게 신기하기도 하고 두려움도 살짝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그들이 호주에 도착했을 때 프랭크는 어머니 건강에 이상이 있음을 깨달았고 병원에서 검사를 해보니 췌장에 문제가 있어 정밀검사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모두 기도로 힘을 보탰다. 그 후 1년, 프랭크의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인도네시아에서 선교를 시작할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어머니와의 시간은 함께 할 수 있도록 그들을 호주로 돌아가게 하신 걸까?


프랭크 선교사님은 설교할 때 사용했던 성경책을 나에게 주고 떠났다. 그들이 떠난 지 5년, 지금은 더 이상 연락을 주고받지 않지만 인도네시아의 더운 날씨 속에 겉껍질이 닳아가는 성경책을 보며 오늘 문득 그들이 보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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