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건기에 해가 들지도 않는 뒤뜰 모퉁이에 날아든 고추씨가 뿌리를 내리고 싹을 돋아나게 하더니 홀로 열매를 맺고 어느새 그 열매가 성인 손가락 하나 만해졌다.
처음 보고 풀이라 생각하고 뽑아내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내가 조금만 더 부지런했더라면 저렇게 탐스런 고추를 맺어보지도 못하고 죽어 갔겠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의 게으름을 처음으로 칭찬해본다.
도움의 손길 하나 없이도 저렇게 멋지게 자라고 보란 듯이 열매를 화려하게 달고 자랑하는 고추나무를 보니 너무 대견하다. 처음 저 구석진 모퉁이에 자리 잡고 서서히 올라올 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며 두고 보는 쪽이었다. 빼서 너른 땅에 새로 자리 잡게 옮겨 줘 볼까도 고민해봤지만 오히려 죽여버리는 결과를 가져올까 그냥 두었다.
처음엔 동남아시아 종인 짜베(다 자라도 새끼손가락 정도 크기이고 아주 맵다)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파프리카과인지 오이 고추인지 모르겠다. 오이 고추도 한인들 사이에서 팔지만 너무 비싸서 사 먹지 않고 초록색 파프리카도 잘 사 먹지 않는데 도대체 어디서 날아든 건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심지도 않은 나무가 저렇게 뿌리내리고 열매까지 맺어가는 모습이 너무 대단하단 생각이 든다. 어렵게 비료까지 챙겨주고 보살펴줘도 못 자라고 죽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홀로 당당하게 결실을 보이는 모습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